[오기완과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의 산티아고 길’ 680㎞를 걷다] ④ 광주 양림선교사묘원
입력 2018-08-28 12:01:01
순례길에서는 여러가지 불편함 속에서 인내의 한계를 경험한다. 광주로 향하는 길은 작은 산도 있었지만 주로 평야의 논길이었다. 벌교 지역 숙소에 들어와 보니 양쪽 발가락에는 작은 물집이 생기다 터져버렸다. 발목이 욱신거렸다.
하루에 30㎞ 도보를 원칙으로 걷는데 며칠도 안 돼 어깨와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나마 도보 구간마다 버스 승강장이 있어 다행이었다. 한적한 승강장 의자에 앉아 무거운 배낭을 풀고 쉬면서 준비한 간식과 물을 먹었다.
순례길을 처음 시작할 땐 읽을 책, 랜턴 등을 넣어 배낭무게만 20㎏이 넘었다. 하지만 걸으면서 1g도 천근만근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옷과 겉옷 두벌씩만 빼고 나머지는 택배로 집에 부쳤다.
여행길에서 배우는 지혜
순례길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거절’이다. 식당과 숙소의 거절, 길을 물을 때 주민들의 거절, 화장실 사용의 거절, 건널 다리가 없어 되돌아오는 도로의 거절 등 여러 형태의 거절을 경험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를 어찌 다 수용하시겠는가. 때로 간절히 기도한 것도 거절하신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도 거절하신다.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다.
벌교에서 보성에 도착했다. 숙소에 들어서자 배낭을 밀어놓고 아픈 무릎부터 살폈다. 오른쪽 무릎이 붉게 부어올랐다. 냉장고 냉동실에 젖은 수건을 놓고 얼렸다. 반복해서 냉찜질을 하고 준비한 소염 진통제를 먹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무릎부터 살폈다. 냉찜질과 약 때문인지 통증이 덜했지만 걷기엔 여전히 불편했다. 이탈리아어에 ‘페스티나 렝테(Festina lente)’라는 말이 있다. ‘천천히 서둘러라’는 말인데, 우리말로 하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뜻이다. 잠깐 녹차밭을 둘러보며 휴식을 취했다.
차도를 걸을 땐 도로 좌측으로 다녔다. 빨리 달려오는 차가 있으면 지팡이를 차도 쪽으로 내밀어 속도를 줄이도록 했다. 그래도 자동차가 빠르게 달려들면 거수경례를 했다. 피해서 운전해 달라는 표시였다. 운전사는 갑작스런 거수경례에 당황했는지, 속도를 줄이며 천천히 지나가곤 했다. 그래도 먼지는 뒤집어썼다.
화순과 나주를 거쳐 걸었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피해 영산강을 따라 광주로 가는 길은 계속 평지였다. 언제부터인가 걷는 게 수월하고 무릎 통증이 거의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광주광역시 칠석동.’ 파랑색 도로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할렐루야!” 여수를 출발한지 8일 만의 일이다.
호남선교의 성지, 광주양림선교사묘원
‘광주 선교의 1번지’ 양림동으로 향했다. 이곳엔 광주양림선교사묘원이 있다. 묘원을 향하는 길 명칭도 우월순길이다. 우월순은 로버트 윌슨(1880∼1963) 선교사의 한국명이다. 광주 기독병원과 여수 애양원병원 설립에 큰 기여를 한 선교사다. 묘원 입구에 윌슨 선교사가 사용하던 사택이 있었다. 지금은 호남신대가 윌슨영성센터로 활용하고 있다.
묘원이 있는 양림산은 해발 108m의 낮은 뒷동산이다. 조선시대에는 돌림병에 걸린 어린 아이를 버리는 묘지였다. 유진 벨(1868∼1925) 선교사는 이 산에 나무를 심고 산자락에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웠다. ‘죽음의 산’을 광주에 근대문화를 전하는 ‘생명의 산’으로 바꾼 것이다.
묘원은 호남선교를 위해 헌신한 26명의 선교사와 그의 가족 등 45개의 비석이 있는, 호남기독교의 성지다. 첫눈에 들어온 것은 한문으로 ‘오목사(吳牧師)’라고 써 있는 큼지막한 비석이었다. 클레멘트 오웬(1867∼1909)의 묘비로 이곳 묘원에 처음으로 묻힌 선교사다.
그는 미국 버지니아주 블랙 월넛에서 출생했다. 버지니아대 의학석사 학위 취득 후 1898년 미남장로회 소속 의료선교사로 입국했다. 유진 벨 선교사 등과 함께 1898년 목포진료소를 개소했으며, 1900년 미국 북장로교 소속 파이팅 선교사와 결혼했다.
당시 미국산 석유가 호남에 처음 보급되자 주민들이 등불을 켤 수 있게 됐다. 그러자 오웬은 이 등불을 선교사업과 비유하며 “우리 빛의 나라가 이 어둠의 나라를 비추고 있다”고 썼다.
오웬은 의사이면서 목사였다. 1904년 광주로 옮겨 의료선교에 힘쓰며 전남지역내 해남 완도 나주 보성 고흥지방을 순회하며 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1905년 수피아여고 뒷동산엔 오웬 선교사의 집이 있었는데, 양림천에 있던 많은 거지와 환자들이 그의 집 주변에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 ‘가난한 자의 이웃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한 것이다.
가난한 자의 이웃 자처한 오웬
쉬지 않고 전도에 열정을 쏟아 붓던 오웬은 1909년 봄 이곳에서 남쪽 100㎞를 내려가 순회전도 활동을 했다. 교회개척과 선교를 위해 동분서주 하면서 전남 장흥에 도착한 주일 아침부터 급성 폐렴으로 고열에 시달렸다.
그는 몸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광주의 윌슨 선교사에게 연락을 했고, 윌슨은 다시 목포에 있는 포사이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포사이드가 도착하기 전 42세 나이로 천국에 갔다. 그의 마지막 말은 ‘아, 그들이 나에게 조금만 안식을 주었다면’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오 목사’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묘비엔 ‘님’이 없다. 젊은 나이에 조선에 와서 이 땅 백성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섰기 때문일까. 예수의 좋은 친구가 되어 섬김의 삶을 살다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했다.
오웬 선교사가 소천하자 그의 아내는 한센병 환자를 돌보다가 네 딸과 함께 귀국했다. 그녀는 1952년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오웬은 어떻게 처참한 조선 땅에서 살 수 있었을까. 강남 고급아파트에 거주하던 의사가 내전과 전염병으로 신음하는 시리아 난민을 위해 텐트촌에 들어가는 결단과 비슷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는 1899년 가을에 쓴 편지에서 “생명의 빛으로 영적인 어두움을 밝혀야 한다”고 기록했다. 가슴이 먹먹하고 저미어 오는 느낌이 들었다.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가르치시고 1900년이 지나 미국 선교사들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한반도 땅을 밟았다. 극동의 작은 나라를 찾아 복음을 전했지만 육신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여기에 남아있다. 아니, 여기에 이렇게 묻히기를 바랐다. 다른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