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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완과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의 산티아고 길’ 680㎞를 걷다] ① 여수 애양원

입력 2018-08-28 12:01:01
오기완 충북대 부총장이 전남 여수 애양원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을 바라보며 애양원부터 양화진까지 도보순례를 결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여수=강민석 선임기자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니 감사’ 등 9가지 감사기도가 적힌 손양원 목사상, 일반인을 상대로 정형외과 피부과 내과를 운영 중인 애양병원 전경, 손 목사가 담임하던 애양원교회 예배당 모습. 교회는 1982년 성산교회로 이름을 바꿨다(위에서부터). 여수=강민석 선임기자



 
오기완 부총장


한국교회는 130여년 만에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했다. 하지만 곳곳에 산재한 신앙 유산을 계승·발전시키고 순례 문화로 승화시키는 일에는 소홀하다. ‘양화진 순례길’의 저자 오기완 충북대 부총장과 함께 전남 여수 애양원에서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까지 1700리(680㎞) 순례길 주요 구간을 동행하며 구한말 선교사의 발자취를 더듬고 기독교 순례길 문화를 꽃피울 가능성을 찾아본다.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아서

스페인 북서쪽 갈리시아 지역엔 순례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가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평원의 아름다운 꽃길, 고풍스러운 도시를 지나간다. 해마다 수십만 명이 들판과 피레네산맥의 돌길을 넘어 800㎞를 40여일 동안 걷는다. 이처럼 가톨릭은 오래전부터 신앙을 지키고 순교자를 기억하기 위해 지역을 성역화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이런 순례활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지 않다.

19세기 후반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등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동방의 끝, 작은 은둔의 나라 조선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왔다. 그들은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다. 선교사들은 한국 땅에서 한국인처럼 살기보다 한국인으로 살기를 바랐다. 죽어서도 이 땅에 묻히고 싶어 한 그들의 묘지는 광주, 전주, 공주, 서울 양화진에 남아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한국에 기독교 순례길이 있다면 그것은 여수 애양원과 서울 양화진을 잇는 길일 것이다. 2년 전 그들이 우리 민족을 향해 전했던 메시지를 다시 듣고자 한반도 남단 여수 애양원에서 호남과 충청도, 경기도를 거쳐 서울 양화진까지 27일간 약 680㎞를 걸었다. 2년 만에 나는 국민일보와 그 길을 다시 찾았다.

의료선교사가 설립한 애양원

배낭에 옷과 수건, 우의, 손전등을 넣었다. 출발지는 애양원이다. 순례길의 첫 출발점을 애양원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다. 초기 선교사들의 헌신적 희생을 본받아 예수 사랑을 몸소 실천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1902∼1950)의 발자취를 묵상하면서 순례를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남 여수시 율촌면에 위치한 애양병원은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목숨을 건 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설립됐다. 질병과 가난으로 처참했던 조선에서 한센병은 저주의 병으로 불렸다.

애양병원은 1909년 미국인 의료선교사 윌리 포사이트가 길가에 쓰러진 한센병 환자를 치료한 것이 계기가 돼 한국에 최초로 세워진 한센병원이다. 당시 광주에 있던 병원은 주민의 거센 항의로 조선총독부로부터 퇴거 명령을 받았다. 이에 따라 1928년 환자 600명이 이곳으로 오게 됐다. 1935년 당시 원장인 윌슨 선교사는 병원 이름을 ‘사랑으로 키운다’는 뜻에서 애양원(愛養院)으로 바꿨다.

병원 뒤쪽에는 광주와 여수에서 한센병 병원을 짓고 환자들을 돌봤던 도성래(스탠리 토플) 원장, 보이열(앨버 보이어) 원장, 우월순(로버트 윌슨) 원장, 보위렴(포사이트) 의사 등 4명의 선교사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있다.

애양병원 옆에는 또 토플게스트하우스가 있다. 애양병원의 마지막 외국인 병원장인 토플 선교사의 업적을 기념하며 붙인 이름이다. 토플은 소아마비 후유증 환자의 재활과 수술을 위한 재활병원을 이곳에 세웠다. 현재 병원은 정형외과와 피부과, 내과, 마취통증의학과를 운영 중이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병원 입구 돌비석에 새겨진 말씀 하나가 109년 애양병원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랑과 순교가 공존하는 공간

1908년 광주에서 창립된 애양원교회는 애양원이 이전하면서 1928년 이곳으로 옮겼다. 1939년 2대 사역자로 부임한 손 목사는 1940년 신사참배 거부로 광주형무소와 청주구금소에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그는 청주구금소 독방에 수감돼 감식형(끼니를 줄이는 형벌)을 받아 몸이 점점 쇠약해졌다. 독감까지 걸려 사경을 헤맬 때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빈방 홀로 지키려니 고적감이 밀려오누나. 성삼위 함께하여 네 식구가 되었도다. 온갖 고난이여, 올 테면 다 오너라. 괴로움 중에 진리를 모두 체험하리라.” 반기독교 세력의 공격, 세속주의의 도전 앞에 안락함만 추구하는 현대 크리스천을 향한 회초리 같다는 생각이 들어 뜨끔했다.

5년을 복역하고 해방과 함께 출소해 애양원교회를 시무하던 그는 1950년 9월 여수 미평동에서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교회는 1993년 4월 27일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을 건립했다. 현재 7대 목사인 정종원 목사가 애양원의 신앙 정신을 잇고 있다. 기념관 건너편 작은 동산에 안장된 손 목사와 정양순 사모, 공산군의 총탄에 맞아 순교한 두 아들의 묘소를 참배했다. 인근엔 손 목사를 기리는 기념 조형물이 있다.

오늘날 애양원은 나환자촌이 아니다. 이곳은 우리에게 참신앙을 가르쳐준 선교사들의 사랑이 숨 쉬고 있는 곳이다. 또 손 목사가 잠들어 있으니 사랑과 순교가 공존하는 장소다. 숙소인 토플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와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 37:5) 말씀을 묵상하고 논길과 밭길을 걷기 시작했다.

▒ 오기완 충북대 부총장은

1953년 경남 거제 출생. 충북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미시시피의대와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박사 후 연구를 수행했다. 1991년 충북대 약학과 교수로 출발, 2016년 약학대학원장을 거쳐 현재 대외협력연구부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충북대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지도교수, 충북대 기독교수회장을 지냈고 현재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청주지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그래픽=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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