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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배우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7>] 성령의 존재는 오감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확인된다

입력 2018-07-21 09:11:16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그림 ‘메노나이트 설교자 안슬로와 그의 아내’. 독일 베를린 국립미술관 소장
 
마르틴 루터가 독일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은신하는 동안 머물면서 성경 번역 등의 작업에 힘을 쏟았던 방. 국민일보DB
 
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크의 초상. 위키피디아
 
박양규 목사


제53문 : ‘성령을 믿으며’라는 고백은 무엇을 믿는다는 뜻입니까?

: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계시는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며, 그분은 나에게도 임하셔서 진실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유익을 누리게 하시고 나를 위로하시며 영원히 나와 동행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제55문 : 당신은 ‘성도의 교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 믿는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 된 구성원으로서 그분과 함께 연합하고 그분으로부터 부요와 은사를 얻습니다. 각 구성원은 다른 지체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 항상 기쁘게 그 은사를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하다 어떤 제자들을 만났다. 바울이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바울의 이 같은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많은 사람이 ‘성령’의 존재를 믿지 않거나 혹은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부분은 ‘성령을 믿사오며’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성령의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두 가지 전제를 염두에 둬야 한다. 성령의 존재와 그 정체성이다.

성령의 존재를 믿는다

에베소 제자들처럼 성령의 존재를 믿는 것은 간단치 않다. 인간의 오감(五感)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찬송가 545장은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라고 했다. 작사자의 고백처럼 우리도 눈과 귀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경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53문의 내용처럼 성령은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을 고백하게 하고, 성령께서 동행하고 계심을 믿게 한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 렘브란트의 그림 ‘메노나이트 설교자 안슬로와 그의 아내’를 보자. ‘메노나이트’란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네덜란드에서 메노 시몬스(Menno Simons)를 따르던 무리를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근본주의적으로 성경에 순종했고, 청교도와 침례교 등에 큰 영향을 줬다.

그림에는 청교도풍의 옷을 입은 안슬로와 아내가 등장한다. 아내의 목에 둘러진 털옷과 흰 손수건에서 이들이 부유한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아내는 종교인의 옷을 입고, 풍족해 보이지만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확신에 찬 얼굴로 아내를 설득하고 있는 남편 안슬로의 오른편엔 성경책이 펼쳐져 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안슬로에게 평안과 확신을 주고, 그의 삶을 지탱하는 근원임을 렘브란트는 그림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만일 성령의 동행함을 믿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성령을 오감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안슬로와 그의 아내가 성령의 존재를 눈과 귀로 확인했다면 성경은 더 이상 존재 의미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존재는 오감이 아니라 기록된 성경을 통해 믿음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성령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마치 천사 수준의 영(靈)으로 이해한다. 그러다 보니 신자들 중에는 자신이 필요한 곳에 별도로 성령이 오기를 요청하고 간구할 때가 있다. 필요할 때 방언으로 표현돼야 하고, 선택의 순간에 오감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길 바란다. 하지만 성령은 무속인이 신접하는 것처럼 들어오거나 나가는 존재가 아니다. 감정적으로 충만하게 채워주는 존재도 아니다. 성령은 성부, 성자와 동등한 하나님이며, 예배와 순종의 대상이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성령이 말씀을 토대로 일하신다는 사실이다.

두 가지 전제만 바로잡아도 신앙의 태도가 달라진다. 기도할 때, 성경 말씀을 믿고 기도하는 것으로는 왠지 부족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방언과 예언이 오감으로 느껴져야 ‘비로소’ 성령이 동행하고 있다고 안도하곤 한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성경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성경이 아니라 눈과 귀로 얻어지는 성령의 메시지를 더 중시할 때가 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선택하기보다 꿈에서 본 이미지나 신앙이 깊은 누군가의 조언에 의지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과연 이런 자세가 성경에 대한 믿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성령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는 천사 수준의 영이 아니라 우리의 전 인격을 통해 굴복해야 할 하나님이다.

구텐베르크를 생각하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부분, 성령을 통한 성도의 교제, 죄사함, 부활, 영생과 같은 ‘황당한’ 내용이 믿어지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성령이 우리 속에서 작용하고 계시다는 증거다. 이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성경을 들을 때 생긴다(롬 10:10). 그래서 바울은 성경과 성령을 불가분의 관계로 간주했다(엡 6:17). 물론 성경의 문자가 성령은 아니지만 성경을 ‘통해서’ 성령이 일하신다.

성령을 이해하는 데 있어 500년 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중세시대에도 교회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나 믿음을 통한 구원, 즉 성령의 작용이 나타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성경이 확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성경은 성직자, 수도사,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사람들은 성경을 듣는 것이 아니라 금욕, 고행, 헌금, 순례 등을 통해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 성경과 무관한 노력을 기울였다.

평범한 시민들이 성령과 ‘접촉’할 수 있도록 만든 공로자는 먼저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와 성경번역가들이다. 여기에 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크를 빼놓을 수 없다. 독일의 마인츠 지방에서 화폐를 찍어내던 그는 인쇄술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을 알았고, 오랜 노력 끝에 이를 개발했다. 그 덕분에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3주 만에 유럽 전역에 퍼져나갈 수 있었고, 인쇄된 성경이 평범한 사람들의 손에 들려졌다. 진리가 교회의 벽을 넘어 세상 속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앞서 15세기 라틴어 성경을 인쇄한 구텐베르크는 성경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켰는지 똑똑히 지켜보고, 이렇게 회고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쉼 없이 전파될 수 있는 것은 확실히 인쇄술 덕분이다. 진리가 그렇게 흘러가서 무지를 깨우고 사람들을 밝힌다. 보물처럼 봉인된 활자 속에 진리가 담겨 있다. 봉인을 풀고 진리가 날개를 달게 하자. 막대한 비용으로 소수에게 독점되는 것은 끝났다. 인쇄기가 멈추지 않는 한 진리는 모든 사람의 영혼에 도달할 것이다.”

500년 전처럼 지금도 진리는 성경을 통해 전파되고 성령은 성경의 조명을 통해 일하신다. 누구든지 성령을 믿고 순종할 수 있게 된 것, 이것이 우리가 구텐베르크에게 진 빚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성령을 자의적으로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성경을 통해 이뤄지는 성령의 사역을 제대로 되새길 때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눔과 적용을 위해서 생각해 볼 것은

☞ 내가 ‘성령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 ‘성령운동’ 혹은 ‘성령체험’은 어떤 위험 요소를 내포하고 있을까요? 그것이 건강하게 이뤄지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요?

글=박양규 목사

△서울 삼일교회 교육디렉터 △청소년을 위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2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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