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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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배우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위로돼야 진정한 위로다

입력 2018-06-13 09:11:16
독일의 관광명소로 알려진 하이델베르크의 넥카강을 가로지르는 옛 다리의 모습. 오른편 끝에 보이는 첨탑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탄생한 성령교회다. 박양규 목사 제공
 
20세기 독일 작가 토마스 만(오른쪽)과 그의 형 하인리히 만의 모습. 독일 위키피디아
 
박양규 목사


제1문: 삶과 죽음 사이에서 당신의 유일한 위로(행복)는 무엇입니까?

답:
나의 삶과 죽음에서 나의 몸과 영혼은 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피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지불하셔서 죽음과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성령으로 확신시켜 주셔서 이후로는 그분을 위해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종교개혁도 하나의 역사다. 우리가 종교개혁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면, 종교개혁은 과거의 사건에 불과할 뿐이다. 신학적 담론으로서의 ‘종교개혁’은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울림이 없다. 루터와 칼뱅을 영웅적 인물로 칭송하고 ‘이신칭의(以信得義)’를 논하는 것도 그렇다. 힘겨운 삶의 굴레를 견뎌내는 이들에게 좀 더 울림을 주는 ‘우리의 이야기’를 종교개혁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이번 연재를 통해 500년 전, 지금과 비슷한 처지에서 하루하루 살아갔던 이들의 이야기를 말하고자 한다.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영주들의 영지에서도 이들의 토지 독점에 반발해 기사들이 반란(1522)을 일으켰다. 또 루터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 뮌처는 농민전쟁(1524)을 이끌었다. 당시 ‘헬 독일’에서 살아가던 이들의 이야기다.

이를 위해 먼저 16세기 독일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루터는 1517년 종교개혁을 일으켰으나 1521년 이단으로 법정에 소환됐다. 그러나 독일 내에서 그를 지지하는 귀족이 늘어나면서 정치 세력을 형성했다. 1526년 제1차 슈파이어 회의에서 종교적 자유를 허락받았고, 1547년 슈말칼덴 전투에서 가톨릭의 공세를 막아낸 후,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和議)에서 정식 종교로 인정받았다. 이 과정에서 ‘루터파’는 가난한 하급기사들, 굶주린 농민들, 소수의 유대인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상대적으로 칼뱅파는 약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칼뱅은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가지든지 그것은 신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므로 최선을 다하라는 ‘직업소명설’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하층민들의 지지를 받은 칼뱅파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배제된 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때까지 사회에서 ‘을’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1563년 탄생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바로 이런 칼뱅파의 목소리를 담아 작성됐다. 암울한 시기에 그들이 던진 첫 번째 질문은 인생의 위로(행복)에 대한 것이다. 칼뱅파 기독교인들에게 참된 위로는 무엇이었을까? 갑이 되는 것일까. 정치적으로 군림하는 위치에 서는 것일까.

그런 그들에게 주어진 답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우리 인생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한다. 직업소명설과 연결해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귀족이건 농민이건, 부자이건 빈자이건,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 신의 부르심으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다(고전 7:24, 살후 1:11).

그들을 통해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태동했다. 신을 위한 삶은 사회의 윤리적 영향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속에서 가져야 할 사명이며, 그 결과가 위로와 행복의 근거가 돼야 한다.

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교회가 되새겨봐야 할 내용이다. 우리는 ‘개인의 성취’를 ‘행복의 조건’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개인의 관심사를 ‘기도제목’으로 주고받으며, 신앙을 행복을 위한 들러리로 삼고 있지 않은가. 하이델베르크 1문의 위로는 단순히 개인적 관심사를 뜻하지 않는다.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윤리성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 부문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 20세기 독일작가 토마스 만(Thomas Mann·1875∼1955)이다. 그의 형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1870∼1950)과 토마스는 둘 다 작가의 길을 걸었다. 독일의 독실한 루터교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두 사람이었지만, 문학적 지향점은 사뭇 달랐다. 하인리히는 ‘작가란 사회 속에서 양심의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반면, 토마스는 인간 개인의 내면, 고뇌, 행복 등을 소재로 삼았다. 두 사람의 입장 차이는 한동안 그들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두 형제의 갈등은 오늘날 교회에서 벌어지는 신앙 논쟁 같아서 결코 낯설지 않다.

토마스 만의 초기작 ‘행복에의 의지’(1896)는 그의 문학적 지향점을 반영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파울로’는 병약한 청년이었지만 모진 반대를 무릅쓰고 지극히 사랑하던 여인과 결혼한다. 이것이 그에겐 행복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성취되는 순간 그가 죽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행복에 대한 파울로의 의지가 채워졌을 때,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한국 기독교의 자화상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행복의 조건을 위해 기도하지만 응답을 경험하면 더 이상 신앙생활의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사회 속에서 양심의 소리를 내는 것은 ‘신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그늘진 주변에 대한 시선을 닫는다.

토마스 만이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고 형 하인리히와 한목소리를 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독일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헌법 위에 세워진 바이마르 공화국이 히틀러의 등장과 함께 몰락하고, 종교개혁의 후예였던 독일 교회가 나치 정권의 시녀가 되자 토마스 만은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192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뒤 그는 ‘마리오와 마술사’(1929)를 내놓았는데, 사회를 환각상태에 빠뜨리는 인물로 히틀러를 묘사했다. 그의 용기 있는 목소리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독일인의 양심’이란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위협으로 인해 1938년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토마스 만은 “사람은 개인으로 살아가지만, 타인들과 함께 그 시대를 살아간다. 우리가 시대의 악에 너그럽다면 범죄의 동조자일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젊은 시절의 토마스 만처럼 한국교회의 관심은 인간 개인의 내면과 고뇌, 행복에만 머무는 건 아닐까. 파울로처럼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위로’라면 ‘쟁취하고 나면 공허해질’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개인에게도 위로일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위로가 되어야 진정한 위로다. 내 자리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 의식을 고취하고, 사회의 양심으로서 소금이 되는 것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위로이자 행복이다.

과연 우리는 시대의 양심으로, 시대의 불의에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500년 전 그들이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흔적을 남겼듯이, 부르심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다른 ‘사회의 윤리’를 세우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델베르크 제1문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나눔과 적용을 위해 생각해 볼 것은
☞ 당신이 생각하는 인생의 위로와 행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신의 ‘기도제목’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인생의 위로와 행복은 무엇일까요?

박양규 목사 약력
△총신대 신학대학원 △고려대 서양사학과 석사 △영국 애버딘대 박사과정 수료 △소명중고등학교 교사 △삼일교회 교육디렉터 △청소년을 위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2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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