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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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 아기들의 묘비 앞에서

입력 2022-12-22 04:05:01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아기들의 묘비가 모여 있다. 묘원의 남서쪽 가장 낮은 자리, 연희전문을 설립한 언더우드 가족과 세브란스병원을 세운 에비슨 가족 묘역 인근이다. 무릎 높이의 자그마한 비석엔 ‘Infant’란 표기가 대부분이다. 정식 이름으로 불리기 전 태어나자마자 죽은 경우가 많다. 부모인 선교사를 따라 한국에 와서 태어났지만 열악한 위생과 건강 상태로 곧바로 천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던 아이들, 순수한 영혼들이 묻힌 곳이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1890년 존 헤론 의료 선교사가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다가 내한 5년 만에 이질로 사망하면서 조성됐다. 이후엔 선교사의 아기들이 잇따라 묘원에 이름을 올린다. 1893년엔 RA 하디 선교사의 딸 마리가 태어난 지 하루 만에, 같은 해엔 WD 레이놀즈 선교사의 한 살 된 아들이, 1894년엔 윌리엄 M 베어드 선교사의 한 살 된 딸이, 역시 같은 해 CC 빈튼 선교사의 아들이 한 살 나이에 숨졌다. 선교 초창기인 1900년 말까지 양화진에 묻힌 17명 가운데 10명이 4세 이하 영유아였다.

선교사들에게 자녀들의 죽음은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부모는 선교사로서 신앙적 결단에 의해 머나먼 조선 땅에 자의로 왔다고 하지만 아이들은 무엇 때문에 고난을 넘어 목숨까지 잃어야 했는가. 캐나다 토론토 의과대학 출신 선교사로 내한해 1903년 선교사연합사경회 회심 체험으로 원산 대부흥의 주역이 된 RA 하디 선교사는 1909년 여섯 번째 딸 마거릿을 잃고 시신을 양화진에 안장하며 앞서 1893년 죽은 언니 마리의 이름도 새겨 넣었다. “한 생명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기록도 남겼다.

충북 선교의 개척자인 FS 밀러 선교사는 두 아들과 아내를 양화진에 묻었다. 1898년 첫아들이 출생 8개월 만에 사망했고, 1902년엔 둘째 아들이 역시 출생 하루 만에 숨을 거뒀다. 첫째에 이어 둘째 아들마저 잃고 충격을 받은 부인 역시 시름시름 앓다가 이듬해 6월 숨졌다. 38세의 젊은 나이였다.

당시 밀러 선교사를 두고 조선인들이 수군거렸다. ‘예수가 누구라고 조선까지 와서 이 고생인가. 차라리 미국으로 돌아가지.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이런 눈빛에 밀러 선교사는 1905년 자신이 작사한 찬송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의 노랫말로 답했다. 프랑스의 근대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작곡한 위풍당당 행진곡 ‘마을의 점쟁이’ 곡조에 가사를 붙인 찬양이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 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추한 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 되고/ 우리 평화 되시네.’

부모는 앞서간 자녀를 자신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이태원 참사로 생때같은 자녀를 앞세우게 된 부모들이 국회를 찾아가 눈물과 울분을 터뜨리는 장면이 반복되고 있다. 국민의힘 소속 창원시의원은 유족들을 향해 ‘시체 팔이’를 주장하며 2차 가해를 진행했고, 여야는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참여를 정치적 조건들로 연계하며 한때 진상 규명을 늦추기도 했다. 유족 대표들이 나서 “예산안 처리와 이상민 해임건의안이 이태원 국정조사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절규하던 목소리가 생생하다.

자녀를 가슴에 묻은 유족들조차 보듬지 못하면 그건 정치가 아니다. 백해무익한 싸움일 뿐이다. 하루빨리 유족들의 뜻대로 참사에 대한 명확한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책이 마련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우성규 미션탐사부 차장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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