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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영성 작가] 폭풍에도 튼튼하게 버티는 언덕의 나무처럼 사랑·용서 있다면 우린 비틀어지지 않아

입력 2022-11-12 03:10:01
게티이미지뱅크












18세기 말 영국 요크셔의 외딴 마을,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서 있는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이라 불리는 저택이 서 있다. 저택의 주인 언쇼는 어느 날 리퍼블에서 한 명의 고아를 데리고 돌아온다. 그는 아이에게 히스클리프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자기 아들인 힌들리, 딸 캐서린과 함께 키운다. 그러나 양부 언쇼가 죽자 히스클리프는 힌들리에게 심한 모욕과 학대를 받고, 사랑하는 캐서린에게 배신을 당하고 가출한다. 히스클리프는 3년 후 부자가 돼 돌아오지만, 캐서린은 이미 지주인 에드가 린튼과 결혼한 후였다. 이때부터 히스클리프의 냉소적이고 악마적인 복수가 시작된다.

히스클리프는 에드가 린튼의 누이동생 이사벨라를 유혹해 아내로 삼고 학대한다. 캐서린은 딸 캐시를 낳고 죽고 만다. 히스클리프는 캐시를 자신과 이사벨라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강제로 결혼시켜 린튼 집안의 재산을 차지한다. 그러나 히스클리프의 복수심은 그를 서서히 죽어가게 했다. 폭풍이 불어닥친 어느 날 밤 그는 사랑했던 캐서린과 만남을 꿈꾸며 원인 모를 죽음을 맞는다. 결국 언쇼 집안과 린튼 집안의 살아남은 상속자들이 결혼함으로써 평화가 찾아온다.

‘영국 문학의 3대 비극’ 중 하나로 꼽히는 소설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의 줄거리이다. 영국의 에밀리 브론테(1818~1848·사진)가 쓴 ‘폭풍의 언덕’은 언쇼 집안과 린튼 집안에 히스클리프라는 부랑아가 몰고온 파문을 짤막한 서문과 제3자의 회상체로 그린다. 황량한 자연을 배경으로 거칠고 악마적인 인간의 애증을 서정적이면서 강력한 필치로 묘사한다. 출간 당시 내용이 너무 어둡고 잔인하며 비윤리적이란 비평을 받았지만 20세기 들어서 서머싯 몸 등에 의해 재평가받았다.

에밀리 브론테는 이 소설에서 ‘자비와 용서’의 문제를 다룬다. 이는 기독교 가치관의 핵심인 ‘죄와 은혜’의 문제로 연결된다. 작품은 정죄하는 기존의 인습적 기독교를 비판하고 약자와 주변인에 관한 관심과 사랑에 기초한 진정한 기독교 가치들을 주장한다. 또 이런 가치들이 기독교 핵심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기초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에밀리 브론테의 작품에 기독교적 요소가 갖는 중요성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에밀리의 사고 가장 깊은 곳엔 자비와 용서라는 기독교 가치들이 자리한다. 샬럿 브론테는 ‘폭풍의 언덕’ 1850년 판 서문에 에밀리의 가치관을 이렇게 서술했다. “그녀는 자비와 용서를 남자와 여자를 모두 만드신 위대하신 존재의 가장 신성한 속성이라고 보았으며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옷이 어떤 연약한 인간도 치욕스럽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비와 용서보다 서로 심판하고 정죄하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을 따르거나 그보다 더한 복수에 전념한다. 히스클리프가 복수하려는 외적인 이유는 어린 시절 힌들리에게 받았던 심한 학대에 있다. 그는 힌들리를 굴복시켜 자신이 받았던 만큼의 학대를 가하고, 그의 아들 헤어튼에게 자신이 겪은 학대를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그는 힌들리가 죽은 후 헤어튼에게 “자 이제 너는 내 것이야. 한 나무가 그것을 비트는 똑같은 바람을 맞을 때 다른 나무와 똑같이 비틀어지지 않는지 봐야겠다”라면서 그를 하인으로 기르며 교육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임금도 주지 않고 일을 시켰다.

그러나 캐서린의 딸 캐시와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의 삶의 태도는 그들의 부모와 달랐다. 캐시는 학대받으며 거칠게 자란 헤어튼을 부드러운 사랑으로 변화시킨다. 헤어튼 역시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에 이어 거친 히스클리프 밑에서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자랐지만 히스클리프가 죽었을 때 진심으로 슬퍼하는 유일한 사람이 돼준다.

사실 헤어튼은 복수의 가장 큰 희생자였다. 히스클리프는 아버지 힌들리를 방탕하고 타락하게 만들고 모든 재산을 빼앗으며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헤어튼은 복수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진정한 사랑과 용서를 보여준다. 히스클리프와 똑같은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비틀어지지 않았다. 작가는 ‘한 나무가 그것을 비트는 똑같은 바람을 맞을 때 다른 나무와 똑같이 비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작품에서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고통을 통한 구원의 원리와 증오심이 사라져 복수를 스스로 멈춘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히스클리프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던 인간성을 깨운 것은 다름아닌 지난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준 캐서린에 대한 기억이었다. 이는 가정부 넬리의 목소리로 표현된다. “그 두 사람(헤어튼과 캐시)의 눈은 아주 많이 닮았고 돌아가신 아씨의 어머님, 캐서린 언쇼 아씨의 눈 그대로랍니다. 그렇게 아씨를 닮은 점이 히스클리프씨의 마음을 너그럽게 한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폭풍의 언덕’ 중)

그는 평생을 복수에 매달렸지만 이제 더 복수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넬리에게 고백한다. “나의 폭력적인 전력투구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결론 아니오? 나는 두 집을 부수기 위해 지렛대와 곡괭이를 들었고 헤라클레스처럼 일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단련해왔지만 모든 것이 준비되고 내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 지금 나는 두 집 지붕의 슬레이트 하나를 들어 올릴 의지가 없소. 나의 옛 원수들이 나를 쳐부순 것이 아니요. 지금 바로 그들의 대리인들에게 복수할 그때이겠지요. 나는 그것을 할 수 있고,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소. 그러나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나는 내리치고 싶은 마음이 없고 내 손을 들어 올리는 수고도 하고 싶지 않소.”(‘폭풍의 언덕’ 중)

결국 작가는 폭풍을 정면으로 받아도 튼튼하게 버티는 ‘폭풍의 언덕’의 모습처럼 비바람을 맞아도 인간성이 비틀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전한다. 작품은 악인에게 잠들어 있는 선함을 깨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히스클리프는 악인인가 희생자인가란 질문을 남긴다. 출간 당시 독자들은 작품세계에 나타난 강렬한 사랑과 끝없는 용서, 너그러운 자비, 정죄하지 말 것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강력히 비판했다. 그러나 작가는 복음주의가 한창 부흥하던 19세기 중반 영국의 독자들에게 이웃을 정죄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라는 기독교의 이상을 제시했다.

이런 작가의 영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에밀리 브론테는 영국 요크셔주 손턴에서 성공회 목사인 패트릭 브론테와 마리아 브란웰 사이에서 여섯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 중 셋째 딸이 ‘제인 에어’를 쓴 샬럿 브론테이다. 에밀리는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하워스 교구에서 자랐는데 세 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고 청소년기에 두 명의 언니들도 병사했다. 남은 네 남매는 광활한 히스벌판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며 이따금 각자 또는 공동으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지어서 서로 들려주며 문학적 재능을 키워갔다.

특히 세 자매는 문학적 재능과 역량을 서로의 존재에 기댄 채 함께 읽고 각자의 노트를 채워 가며 훈련했다. 1846년 세 자매의 가명을 제목으로 한 공동 시집 ‘커러, 엘리스, 액튼 벨의 시 작품들’을 냈다. 이듬해엔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과 앤의 ‘아그네스 그레이’, 샬럿의 ‘제인 에어’가 출간됐다.

에밀리의 ‘영적 저수지’는 성공회 사제였던 아버지의 사제관이 있던 영국 요크셔의 벌판이었다. 어린시절 이곳에서 작가로서의 상상력을 길렀고 벌판의 폐가에서 영감을 얻어 ‘폭풍의 언덕’을 썼다. 그는 ‘폭풍의 언덕’으로 국내엔 소설가로만 알려졌지만 영미권에서는 시인으로서 인정받고 있다. 시집 ‘죄수’ ‘제 영혼은 비겁하지 않습니다’ 등을 남겼다. 안타깝게도 그는 ‘폭풍의 언덕’이 출간된 이듬해인 1848년 폐결핵에 걸려 30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쓴 시 ‘제 영혼은 비겁하지 않습니다’는 강한 믿음의 소유자였던 ‘에밀리 브론테’를 기억하게 한다.

“제 영혼은 비겁하지 않습니다/세상의 폭풍우 거친 영토에서 바들대는 이가 아닙니다/밝게 빛나는 하늘의 광영을 보면/믿음도 똑같이 빛나서, 공포로부터 저를 무장시키니까요/오, 저의 가슴속에 계신 하나님/전능하고 항존하는 신이시여…모든 존재가 당신 안에서 살아 있을 것입니다/죽음이 설 장소는 없습니다/그는 무에서 원자 하나 만들어 내지 못하니까요/당신만이 존재요 생명입니다/당신의 본질은 절대 파괴되지 않으니까요.”(시 ‘제 영혼은 비겁하지 않습니다’ 중)

이지현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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