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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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목회자의 ‘용서’… 전쟁 중 무더기 학살 막았다

입력 2022-10-27 03:10:01
이금성(왼쪽) 장흥교회 원로장로와 한찬희 담임목사가 26일 강원도 철원군 교회에서 서기훈 목사 순교기념비를 가리키고 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롬 12:17, 새번역)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며, 즐거워하는 자들과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로마서 12장 말씀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당부로 마무리된다.(롬 12:14~21) 그리스도인을 산 채로 화형시키고 나중엔 원형경기장 사자 굴에 던져 넣었던 로마제국에 맞서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대항하지 말고 되갚지 말며 용서해야 한다고 말한다. 6·25전쟁이라는 내전을 경험한 한국교회에 버팀목이 됐던 말씀이다.

서울 여의도에서 북쪽으로 두 시간 차를 몰면 휴전선 최전방 강원도 철원의 장흥교회(한찬희 목사)에 도착한다. 교회와 사택 사이엔 ‘사어당사비당사(死於當死非當死) 생이구생불시생(生而求生不是生)’이 새겨진 서기훈(1882~1951?) 목사 순교비가 있다. 당연히 죽어야 할 때 죽는 것, 이는 참죽음이 아니요, 살아 있으면서 살기를 바라는 것, 이도 참생명이 아니라는 뜻이다. 서 목사가 공산군에 끌려가 실종되기 전 교인에게 써준 칠언절구 한시다.

서 목사는 1947년 65세 나이에 장흥교회에 부임했다. 철원은 38선 이북이어서 당시 북한 정권의 관할 아래 있었다. 서 목사 부임에 앞서 46년엔 교회 청년들 중심으로 반공 비밀결사인 신한애국청년회가 결성돼 활동하다 발각되면서 40여명이 체포됐고 나중엔 옥중 순교자도 나왔다. 6·25가 터지고 주변에서 월남을 권유했지만 서 목사는 “어찌 목자가 양을 버리고 갑니까”라며 교회를 지켰다. 9·28 서울수복 이후 국군이 북으로 밀고 올라오며 험악한 상황이 벌어진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이금성(84) 장흥교회 원로장로는 26일 이렇게 말했다.

“치안대원들이 좌익 세포와 그 가족들 70~80명을 잡아서 가둔 뒤 처형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신한청년회 활동으로 옥고를 치렀기에 갈등이 컸습니다. 이때 외출했다가 돌아온 서 목사님은 이 광경을 보고 사택으로 돌아가 짐을 싸셨습니다. 청년들이 놀라 찾아가니 목사님이 호통을 치십니다. ‘나는 전도자로 왔다. 내가 너희들에게 예수 사랑을 가르쳤지, 원수를 만들고 사람을 죽이라고 가르친 적 없다.’ 모두 무릎을 꿇고 잘못을 회개한 뒤 좌익들을 풀어 줍니다. 이 때문에 중공군 개입으로 다시 남으로 쫓겨갈 때 우익 진영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합니다. 목사님 덕분에 학살을 막았습니다.”

공산군 치하에서도 새벽종을 울리며 새벽기도를 이어가던 서 목사는 한탄강 암벽 방공호에 숨은 사람들의 심방을 다니며 양을 돌보다 결국 1951년 1월 공산군에 끌려가 실종된다. 당시 10대 초반이던 이 장로가 사모를 모시고 서 목사 시신을 찾으러 눈 덮인 산악지대를 돌았으나 헛수고였다. 한국전쟁은 마을로 들어간 전쟁이었다. 마을마다 좌우익으로 나눠 죽고 죽이는 보복극이 벌어졌고 교회도 이를 피하지 못했다. 서 목사의 장흥교회와 전남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 전남 신안과 영암의 몇몇 교회의 용서 이야기는 오히려 예외에 가깝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용서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국경선평화학교 대표인 정지석 목사는 말한다. 정 목사는 장흥교회에서 차로 10여분 떨어진 철원 비무장지대(DMZ) 바로 앞에서 10년째 피스메이커(평화활동가) 육성과 청소년·시민 DMZ 평화교육을 이어오고 있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대학원에서 에큐메니컬 평화학을 전공한 정 목사는 “용서는 한국교회의 잃어버린 보물”이라며 “공손한 자세로 소통하는 화평의 공동체를 위해서라도 용서의 영성을 회복하는 일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철원=글·사진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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