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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덥워’ 아닌 ‘더워’가 됐나… 맞춤법 통일 40년 재구성

입력 2022-10-06 19:20:01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조성된 ‘주시경 마당’에 6일 가을 색이 물들고 있다.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 마춤법 통일안’의 두 기둥 중 하나인 ‘어법에 맞도록 적는다’는 원칙은 ‘본음’과 ‘원체’를 밝혀 적어야 한다는 주시경의 표기 이론에서 시작됐다. 최현규 기자




한글날을 앞두고 흥미로운 책이 나왔다. 김병문 연세대 근대한국학연구소 부교수가 쓴 ‘<한글 마춤법 통일안> 성립사를 통해 본 근대의 언어사상사’는 한글 표기법 통일 과정을 통해 국어의 탄생기를 들려준다. 1890년대 근대계몽기에 국문 논의가 시작돼 1933년 조선어학회의 ‘한글 마춤법 통일안’ 제정으로 완료되기까지 40여년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했다. 현재는 ‘맞춤법’이 맞지만 1930년대엔 ‘마춤법’으로 썼다.

한 국가의 공용어이자 공식어인 ‘국어’는 말을 글자로 어떻게 표시할 것인가와 관련한 규칙인 표기법의 제정과 함께 비로소 시작된다. 근대는 민족을 단위로 한 국민국가가 전 세계를 뒤덮어가는 시기였는데, 이를 언어적 측면에서 보면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각국의 민족어들이 표기법을 갖추고 표준화되어 국어의 지위에 오르는 과정이기도 했다.

전근대적 언어 상황에서는 제국의 언어가 보편 문어로 기능하면서 공적, 학술적, 종교적 텍스를 장악하는 대신, 입으로 내뱉는 일상어로는 각 지역의 세속어(모어, 민족어)가 사용됐다. 이와 같이 한 사회에서 두 개의 언어가 사용되는 ‘다이글로시아(diglossia)’ 상황을 극복하고 단일언어사회로 나아가는 일을 저자는 ‘언어적 근대’라고 표현한다.

언어적 근대란 다시 말하면 일상어를 말하기 뿐만 아니라 쓰기를 포함하는 의사소통의 전 영역으로 확대하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표기법 문제가 제기된다. 근대 이전에는 세속어로의 글쓰기 자체가 일반적인 게 아니었고 모범이 될 만한 문장의 형태도, 합의된 표기법도 마련돼 있지 않았다. 세속어를 글쓰기에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표기법의 통일이 필수적으로 요청됐다.

한글은 15세기 중반 세종에 의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창제됐으나 오랫동안 ‘언문’으로 불리며 공적 언어로 사용되지 못했다. 1890년대 조선의 계몽사상가들은 한글 사용 문제가 단순히 문자의 변화가 아니라 생활 습속과 정치 체제 등을 근대화하는 문제와 연결돼 있음을 인식했다. 그러면서 국문과 국어가 전 사회적인 논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논의는 근대화, 자주 독립, 민족 정체성 등과 관련한 ‘왜 국문을 써야 하는가’, 그리고 표기법의 통일과 관련한 ‘어떻게 국문을 써야 하는가’, 이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됐다.

책은 ‘어떻게 국문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통일안’으로 정립돼 나가는 과정을 주요 쟁점들과 학자들, 논란들 중심으로 상세하게 살핀다. 이 과정을 통해 당시의 지식인들이 국어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맞춤법이 어떤 논리와 역학 속에서 결정됐는지 드러난다.

“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 현행 ‘한글 맞춤법’ 제1장 총칙의 제1항은 1933년 ‘통일안’에서 선언된 뒤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유지되는 한글 표기법의 대원칙이다. 책은 ‘소리대로’와 ‘어법에 맞도록’이라는 두 기둥을 깊고 넓게 파헤친다.

한자를 일부 활용하는 표의적 표기와의 대결 속에서 ‘소리대로’라는 표음적 표기가 원칙으로 확정된 데는 조선총독부가 만든 ‘언문철자법’의 영향이 컸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어 교육에 사용할 교재를 편찬하기 위해서 집필 과정에서 기준으로 삼을 만한 철자법을 정한 ‘언문철자법’을 세 차례에 걸쳐 발표했다. 여기에서 “언문철자법은 순수한 조선어이거나 한자음임을 불문하고 발음대로 표기함을 원칙으로 함”이라고 정했고, 이것이 당대 조선인 전문가들의 동의를 받았다.

‘어법에 맞도록’은 뜻을 파악하기 쉽도록 말의 원래 형태를 밝혀 적는다는 말인데, 이는 주시경의 표기 이론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주시경은 실제 발화로 실현되는 소리가 아니라 ‘본음’과 ‘원체’를 적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 예컨대 ‘마타’나 ‘맛하’가 아니라 원래 이 말이 가지고 있던 모습인 원체를 찾아 ‘맡아’로 적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맡-’의 받침 ‘ㅌ‘은 실제로 나는 소리가 아니지만 원래 있었던 소리인 본음이므로 그대로 적어야 비로소 말과 글이 일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리대로’와 ‘어법에 맞도록’은 서로 충돌한다. 소리대로 적는다면 ‘꼬치’ ‘꼰만’ ‘꼳과’가 돼야 하지만, 어법에 맞도록 적는다면 ‘꽃이’ ‘꽃만’ ‘꽃과’가 돼야 한다. ‘먹는’은 소리 나는 대로 ‘멍는’이라고 쓰지 않고 원형을 밝혀 쓰면서 왜 ‘더워’는 ‘덥워’로 쓰지 않고 소리 그대로 표기하는지 의문이 나올 수 있다. ‘소리대로’와 ‘어법에 맞도록’의 긴장과 충돌, 그리고 통합은 우리 맞춤법을 복잡하고 또 경직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저자는 우리 국어를 정초한 ‘소리대로’와 ‘어법에 맞도록’이라는 두 기둥을 세워나가는 과정에 당대 지식인들의 사상이 반영돼 있다고 본다. 언어를 중심으로 전개된 근대 한국의 사상사를 그려내려는 시도야말로 이 책의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저자는 국어가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이뤄진 언어 규범화의 산물, 즉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국어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열어준다.

“언어공동체에 속한 모두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국어사전’과 ‘국어문법’을 기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국어사전과 국어문법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단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균질적인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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