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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종삼 (4) “좋은 목사 돼 고향 거제로 돌아와 사역하겠습니다”

입력 2022-06-30 03:05:01
이종삼(왼쪽) 목사가 1975년 영남신학교 부산신학사 1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부흥회 참석한다고 결석이 잦았던 나였지만 불량학생은 아니었다. 규율부장을 할 만큼 반듯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목사가 되기로 다짐한 뒤로는 마음이 이미 신학교로 향해 있었다. 한시가 급했다. ‘어서 목사가 돼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데….’ 어린 마음에 의욕이 앞섰던 것이다.

신학교는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가기로 했다. 부산 좌천동에 있던 ‘영남신학교 부산신학사’였다. 이 신학교는 부산장신대의 전신으로 현재 이 대학의 이사장을 내가 맡고 있다. 모교의 이사장이 됐으니 얼마나 보람이 큰지 모른다.

신학교 입학 허가를 받았던 날 환호했던 기억이 난다. 규모가 작았지만 품이 컸던 신학교는 나를 품어 줬다. 내게 신학의 길과 목회자의 삶을 보여준 둥지였다. 목사가 되기로 서원한 학생들은 진지하게 공부했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 안에서 나는 몸과 영이 자랐고 목사로서의 소명을 늘 확인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신앙생활은 편하질 않았다. 덕포교회에 담임목사님이 계시지 않았던 게 첫 번째 이유였다. 더욱이 거제도 전체에 상주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소속 목회자가 고작 두 분뿐이었던 것도 ‘목회자 결핍’의 이유였다.

부흥회마저 따라다니지 않았다면 정말 목사님 설교와 축도를 받지 못한 채 신학교에 입학할 뻔했다. 신학교 입학 전 만난 목사님이 그리 많지 않았다 보니 학교에서 만나는 목사님들 모두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런 결핍은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목사가 되기로 서원한 뒤 한 가지 다짐을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목사 안수를 받으면 반드시 고향 거제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겠노라고 되뇌었다.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약속했었다.

사실 이 다짐을 처음 한 건 신현균 목사님이 거제제일교회 부흥회에 오셨을 때였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주의 종이 될 사람은 일어나라’는 신 목사님의 말씀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뒤 이렇게 기도했었다.

‘주님, 좋은 목사가 돼 꼭 고향으로 돌아와 사역하겠습니다’라고 말이다. 신학교에 입학해서도 다짐은 사라지지 않았고 더욱 구체화했다. 고향 거제에서 복음뿐 아니라 기독교 문화를 세우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었다.

신학교 동기들에게도 입버릇처럼 얘기했었다. “내는 목사가 되면 거제로 갈끼다. 고향에서 목회할 끼란 말이다.” 촌에서 온 신학생이 공부를 마치고 촌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곧이곧대로 믿는 이가 많지 않았다. 친구들은 “진짜 목사 된 뒤에 두고 보자”고 했었다.

신학교 생활은 즐거웠다. 학교도 빠지고 부흥회를 따라다니던 학생이 매일 경건회에 참석하고 강의 전 기도하는 생활이 싫었을 리 없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1980년 복학한 뒤 82년 2월 졸업했다. 4학년 때 서울 광진구 장로회신학대 목회연구과정 입학시험을 치렀고 합격증을 받았다. 목사가 되는 여정의 끝을 향해 점차 다가간다는 감격이 컸다. 하지만 장신대 입학을 위해 학교를 찾았다가 입학처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소식을 듣게 됐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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