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전체메뉴보기 검색

[역경의 열매] 이종삼 (2) 교회 재건 도움 청하려 한경직 목사 찾아 서울행

입력 2022-06-28 03:05:01
이종삼(왼쪽 두 번째) 목사가 1973년 덕포교회를 짓기 위해 건축 자재를 나르던 중 친구들과 함께한 모습.


목사님은 교회가 무너진다고 하셨지만 우리 눈에는 멀쩡해 보였다. 그러던 중 군에서 막 제대한 큰 형님에게 초가 교회를 허물어 달라고 부탁했고 형님은 곧바로 친구 두 명과 지붕에 올라가셨다. 곡괭이로 서너 번 쳤을까. 거짓말처럼 교회가 무너져 내렸다. 다행히 지붕에 올라갔던 이들은 뽀얀 먼지 속에서 걸어 나왔다. 작은 초가집, 덕포교회는 그렇게 사라졌다.

목사님께도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벽돌 만드는 기술자를 보내 주셨다. 예배는 교회가 무너진 자리에 앉아 드렸다. 비가 내리면 우비를 입어야 했다. 덕포 바닷가에서 찍은 벽돌을 1.5㎞ 떨어진 예배당까지 옮기는 게 쉽지 않았다. 남자는 3~4장, 여자는 1~2장씩 지고 석 달 동안 2000여장을 옮겼다.

교회 짓는 속도는 너무 더뎠다. 목사님이 너무 바빴던 게 문제였다. 1973년 6월, 고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기도 중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한경직 목사님을 만나 교회 사정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받아야겠다.’

엉뚱한 상상이었지만 나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부산역에서 밤 기차에 몸을 실었다. 무단결석을 단행하며 떠난 길은 내내 비장했다. 이른 아침 서울역에 내려 물어물어 영락교회에 도착했다. 고딕 양식의 교회당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신없이 교회 구경을 하다 행정실 문을 열었다. 호기롭게 교회를 찾았지만 교회 직원과 목사님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학생일 뿐이었을 것이다. 쉬지 않고 질문이 이어졌다.

어떤 목사님이 “네 이름을 한자로 써 보라”고 하셨다. 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름을 쓰자 목사님들은 ‘쇠북 종(鍾)’자가 맞네 틀리네 하며 옥신각신했다. 오후 4시가 지나자 한 직원이 “목사님은 오늘 안 들어오시니 내일 다시 와야겠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좌충우돌이 시작됐다. 기도하기 위해 기도실을 소개받아 가던 중 화장실에 들렀다. 소변을 보는데 사찰 집사님이 나무라며 호통치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몰랐다. 나중에 기도실에 온 집사님은 “네가 소변기가 아니라 세면대에 소변을 봤단다”라고 하셨다. 촌에서 온 내 눈에는 모든 게 다 같아 보였다. 그러면서 교회가 10시에 문을 닫으니 밤새 기도실을 열어 두는 이웃 교회로 가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깊은 밤, 낯선 길을 물어 그 교회에 도착했는데 그날따라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영락교회로 발길을 돌렸지만, 통금에 걸려 눈에 보이는 여인숙에 들어가 밤을 보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교회로 달려갔는데 한 직원이 다가왔다. “학생, 한 목사님이 오늘도 안 계시는데 교회를 세우고 싶은 학생의 뜻을 우리가 잘 알았으니 한 목사님께 잘 전하겠다. 연락할 테니 돌아가 기다려 달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은 교회 직원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말을 믿고 돌아간 뒤 다시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덕포 예배당은 여전히 빈 자리였다. 그 사이 계절이 바뀌고 해가 지났다. 그러다 드디어 벽 쌓는 기술자가 교회에 와 예배당 벽을 올렸다. 주문한 양철 지붕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도착했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