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경상남도 거제시 덕포다. 거제도의 오른쪽 끝자락 바닷가에 있는 마을에는 사계절 짠 바닷바람이 불었다.
가난했던 시골 마을에도 교회가 있었다. 1951년 6·25전쟁 중 북한에서 피란 온 한 장로님이 세운 덕포교회였다. 내 신앙의 뿌리와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교회를 세운 장로님은 개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산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그 뒤로 다시 덕포를 찾지 않으셨다. 작은 교회에 기대 사는 교인들은 목자 없는 양떼와도 같았다.
1960년대 거제도 전체에 목사는 고작 2명뿐이었다. 훗날 신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우리 교회에는 정식으로 부임한 목회자가 없었다. 모든 게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비와 바람을 피할 집도 변변치 않았다. 결핍은 일상이었다. 없어도 그러려니 하며 살았지만, 목사님이 계시지 않는 교회는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목사님을 보내 달라고 호소하고 싶어도 어디 가서 말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목사님이 부임하시더라도 목사님 가정에 쌀 살 돈을 드릴 예산도 없었다. 사면초가였다. 그래도 교회는 마을 사람 모두를 따뜻하게 품어줬다.
젊은 집사님들이 교회 사찰부터 설교자까지 도맡으셨다. 당시에는 마을마다 부흥회가 수시로 열렸었다. 집사님들은 열심히 부흥회에 참석하셨다. 그곳에서 들은 영의 양식은 목회자가 없던 우리 교회 강단에서 주일마다 선포되던 말씀의 재료가 됐다. 집사님들은 열정적으로 말씀을 선포하셨다. 그렇게 교인들은 복음에 젖었고 ‘쪽 말씀’으로 교회 공동체는 성숙했다.
나는 2남 2녀 중 셋째다. 쓰러질 듯 위태롭던 집과 교회는 담을 맞댄 이웃이었다. 교회 마당은 우리 남매의 놀이터였다. 어머니 최소수 권사께서는 교회를 찾는 손님을 항상 우리 집으로 모셨다. 없는 살림에 밥과 김치, 생선국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그때는 옹기종기 모여 나누는 식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나는 지금도 손님 대접하는 걸 좋아한다. 소찬이어도 함께 식사하며 대화하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모두 덕포교회를 찾은 손님을 대접하던 어머니에게 받은 영향이다.
미국에서 우리나라로 옷이며 밀가루까지 각종 구호품을 보내줬던 기억도 생생하다. 미국에서 물품이 오면 늘 우리 집 마당에 풀어놨다. 그런 날이면 덕포 사람 모두가 우리 집을 들르는 것만 같았다. 어린 마음에 집에 주민들이 가득 모이던 그런 날이 참 좋았었다.
교회 옆에 살던 어머니는 신앙생활을 가장 열심히 하셨다. 새벽기도부터 시작해 교회의 시시콜콜한 모든 모임에 빠지지 않으셨다. 아버지 이성형 집사도 그런 어머니 곁에서 신앙생활을 하셨다.
1972년 어느 날이었다. 거제도의 두 분 목사님 중 한 분이 우리 교회에 세례를 베풀러 오셨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목사님은 우리 교회를 한참 쳐다보셨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대들보가 내려앉았다. 빨리 교회를 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입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