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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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성경, 이젠 현대 표준어로 읽고 싶다

입력 2022-06-04 04:05:01


얼마 전 이웃에게 들은 얘기다. 최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단다. 그런데 설교도 그렇고 성경 용어들이 너무 생소해 적응이 안 된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성경 속 단어들은 왜 이렇게 어렵냐고 물었다. 나는 기독교인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라고 공감을 표했다.

애굽 바사 구스 다메섹 백부장 같은 말이 쏙쏙 이해가 될까. 이집트 페르시아 에티오피아 다마스쿠스 백인대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한자어에 익숙한 시대에 번역돼 굳어진 지명과 인명들을 왜 2022년에 계속 마주해야 할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성경 말씀도 있건만 왜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에는 외계어투성이란 말인가. 성경 용어는 이래야 권위 있어 보이는 걸까.

한글개역이나 한국교회 공예배용 개역개정 성경에 익숙한 분들은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성경 외에 아무 책이나 한번 펴보시라. 자녀 교과서나 일반 도서 뭐든 상관없다. 이집트의 파라오,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폰티우스 필라투스로 표기돼 있지 애굽의 바로, 바사의 고레스, 디베료 황제, 본디오 빌라도란 말은 없다. 기독교인들은 어쩌면 기묘한 이중생활을 하는 셈이다.

혹시 이 같은 불편함을 그대로 방치하는 이유가 성경의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일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개역한글이나 개역개정 성경을 읽으면 안 된다. 그것은 엄청난 죄악이다. 그분들은 1882년 존 로스 선교사가 최초로 번역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나 조선의 유학자로 일본에 건너갔다 기독교인이 됐던 이수정의 ‘마가복음’(1884)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이후 등장한 한글 성경은 모두 일점일획 변개 금지를 위반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근래에 발간된 번역본 성경의 경우 용어의 현대화를 반영했다. 그런데도 지명이나 인명을 모두 현대 통용어로 수정하지는 않았다. 익숙한 단어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최근 나온 ‘새한글성경’의 경우는 적극 수용했지만 이런 성경은 참고용이나 청소년용일 뿐 권위를 가진 성경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성경의 권위란 무엇인가. 단지 특정 세대에게 익숙한 한자어 단어를 포함해야 ‘바이블’인가. 성서고고학과 성서학 발달은 성경 독자를 역사상 어느 때보다 성경의 원문에 근접하도록 돕고 있다. 그래서 새로 번역된 성경일수록 고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문의 의미를 더 명확히 보여준다. 그렇다고 ‘예수’ ‘복음’ ‘교회’ 같은 단어를 예슈아나 좋은 소식, 신자의 모임 등으로 바꾸자는 얘기는 아니다. 인명과 지명만이라도 현대어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사어(死語)가 된 성경 용어는 두 가지 문제를 낳는다고 본다. 첫째 성경의 스토리를 세계 역사와 무관하게 만든다. 구약과 신약의 이야기들은 인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하나님은 대제국들의 생성 발전 소멸의 사이클 속에서 일하셨다. 성경 역사는 고대 이집트를 비롯해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제국을 관통한다. 신약성경은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철저하게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다. 마태의 직업인 세리, 요한이 유배됐던 밧모섬(파트모스섬)과 채석장, 사도 바울의 로마 시민권, 그의 전도여행 경로들은 모두 로마 시대와 관련 있다. 로마 시민의 파트로노스(후원자)와 클리엔스(후원받는 자)의 관계를 알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가 왜 데오빌로(테오필로스)를 두 책 모두에 언급했는지 알 수 있다.

두 번째 위험성은 복음의 친밀성을 가로막는 데 있다. 낡은 언어로는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 없다. 젊은 세대들은 오죽하겠는가. ‘메시지’ 성경을 번역한 유진 피터슨 목사의 말을 다시 곱씹어 본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초청하시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집처럼 느끼도록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과 우리가 삶으로 그분께 응답하는 방식에 익숙해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신상목 종교부장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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