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편성준, 몽스북)에 등장하는 남편은 카피라이터였고 아내는 출판기획자였다. 중년의 부부는 회사를 그만뒀지만 일 자체를 그만둔 것은 아니다. “그동안은 남들이 원하는 것들을 하고 살아왔으니 이제부터라도 스스로 원하는 것들을 하며 살아보려는” 것일 뿐이다. 비싼 가방이나 좋은 오디오, 고급 자동차 등은 포기해야 했지만 일상의 행복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회사를 그만둬도 굶어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스로 느끼는 막연한 불안감을 걷어낼 수만 있다면 새로운 세상은 열린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분투한다. 당연하게도 많은 고난을 겪게 된다. 독자는 힘겹게 ‘인디펜던트 잡’을 찾아가고 있는 그들을 응원하면서 자신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는지 가늠한다.
이제 지식을 근엄하게 가르치는 책은 팔리지 않는다. ‘원론’이니 ‘개론’이니 하는 책들은 출간 자체가 어렵다. 검색하면 알 수 있는 보편적 지식을 담은 책은 퇴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험을 통해 알려주는 지혜(혹은 지성)를 담은 책은 많은 독자가 찾는다. 실용서는 모름지기 유머가 있어야 한다. 앞에 언급한 책에서 부부가 겪는 고난은 유머로 작동한다.
근대 이후 지식은 분절화됐다. 대학에서는 가르치고 싶은 지식을 잘게 쪼개어 가르쳤다. 가령 무용과에서 교수는 춤을 추는 동작에다 번호를 매겨가며 순서대로 춤을 춰보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춤이 아니라 체조에 불과했다. 춤은 온몸이 감응하며 한순간에 튀어나오는 것이어야 했다. 춤은 주먹 쥔 손을 활짝 펴면서 한순간에 보여주는 것과 같아야만 한다.
이것은 일본의 대표적 그래픽 디자이너인 스기우라 고헤이가 말하는 ‘중층성’과 같다. 누구나 평생의 경험이 자신의 머릿속에 켜켜이 쌓인다. 그러다 어떤 외부 자극을 받으면 갑자기 기억 속에서 확 튀어나온다. “한순간 신체는 한 덩어리가 되어 공중에 붕 뜬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하나’가 되는 것, 이렇게 하나가 되는 순간 온몸이 최고조에서 움직이는 한순간이 된다.”
이제 우리는 “‘와!’하고 깜짝 놀라 ‘신체가 하나’가 될 때처럼 동적이고 통합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할 수가 없으면 바로 도태된다. 스마트폰은 통합을 통해 정답을 알려주는 일을 도와준다. 알고리즘을 심어 놓은 스마트폰은 이미 나의 인공지능(AI)이다. 스마트폰은 나의 모든 경험을 빅데이터로 만들어 보관한다. 내가 지시(검색)하면 스마트폰은 텔레메트리 기술을 활용해 즉각 정답을 알려준다. 이렇게 스마트폰은 검색형 독서체제를 강화하면서 모든 일을 편리하게 해준다.
이제 지식의 습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지식의 편집을 통한 지식의 ‘활용’이 중요하다. 지식의 활용은 공유의 형태로 드러난다. 대표적인 것이 유튜브다. 정치인들은 저마다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말한다. 이제 일자리는 중요하지 않다.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는 엘리트는 언제든 직업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능력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책을 펴내기만 하면 평생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확보하는 셈이 된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분절화된 지식만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이제 인간은 자기주도 학습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독자는 그런 학습에 도움이 되는 책을 열렬히 찾는다. 잘난 자들이 생경한 지식을 이론 형태로 알려주는 책들은 인기가 없다. 인기가 있는 책의 저자는 교수나 엘리트가 아니라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일반인이다. 독자는 조직의 미래가 아닌 자신이 지향해야 할 바를 책에서 갈구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부부는 어떻게 됐을까? 페이스북에서는 그들이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나도 그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