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전체메뉴보기 검색

[한국기독역사여행] 서해 낙도에 뿌린 전도 열정… 복음으로 섬을 잇다

입력 2021-08-27 17:10:01
세계로 향한 관문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 영종중앙감리교회.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적했던 섬 영종도 교회는 공항 개발과 함께 상전벽해의 도시 교회가 됐다. 100여명의 원 교인들은 개발에 따른 물질의 유혹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1500여명이 모이는 예배당을 헌당했다. 아래 사진은 초기 초가 예배당과 성도들이다.



 
30여년 영종도에서 사역한 황규진 목사가 교회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1948년 오지섭 목사 당시 헌당된 영종중앙교회(당시 운서교회).
 
장봉도 교회. 오지섭 목사가 산상 부흥회를 이끌던 섬이다.
 
1950년대 말 오지섭 목사 주관 강화 마리산 기도회.
 
2006년 ‘섬 교회’ 마지막 예배. 맨 왼쪽이 황규진 목사.
 
덕적중앙교회 부흥회에서 오지섭(오른쪽 다섯 번째) 목사.




“1990년대 초 인천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영종도 교회에 부임했어요.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었고 무속 신앙이 강한 곳이었죠. 작은 예배당에 ‘한글학교’를 개설했는데 할머니 한 분이 교회 앞에서 합장한 다음 들어서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훗날 권사님이 되셨지요. 그렇게 가난한 심령을 적시던 이 땅이 세계 복음화를 위한 관문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 역사는 아무도 모릅니다.”

영종중앙교회 황규진 목사는 영종도에서 30년 넘게 전도자로 살았다. 그의 30년은 문자 그대로 상전벽해였다. 100명 남짓했던 영종중앙교회는 인천국제공항 등이 들어서며 1500여명이 모이는 중형 교회가 됐다. “복음의 씨를 뿌리는 자 없이는 거둘 수 없습니다. 오지섭 목사 등 신앙의 선대가 도서 지방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와 전도를 했어요. 기독교 전래의 항구 제물포가 가깝지만 그 후면이었던 이 도서 지역에도 하나님 백성이 있었으니까요.”

영종중앙교회는 영종도와 경기만 낙도의 모 교회다. 사실 영종도는 용유도 신불도 삼목도 등 4개섬이 인천국제공항 건설로 간척돼 한 개의 섬이 됐다. 통칭 영종도라 부른다. 영종중앙교회는 1897년 인천 내리교회 영종기도처로 시작됐다. 백운산 아래 운서리에서였다. 섬 교회는 영적 싸움이 쉽지 않다. 해신 굿과 풍어제가 섬을 지배했다. 그런데도 성도들은 영종매일학교를 세우고, 신당을 철거하면서 예수 구원을 외쳤다. 박해가 따랐다. 더구나 일제 말 전국의 교회가 일본기독교단 산하로 강제 편입되면서 훼절하거나 폐쇄됐다. 영종중앙교회는 폐쇄됐다.

해방이 됐다. 예배당은 황폐해져 있었다. 하지만 정성준 장로 등 4~5명이 비밀리에 신앙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때 내리교회 권사이자 당대 한학자이고 웅변가인 오지섭(1917~1999)이 영종도에 들어왔다. “오 권사님, 여기 남아 부흥 집회를 인도해 주십시오.” 교인들의 요청에 “나는 목사가 아니오”라며 극구 사양하던 오지섭은 백운산에 올라 100일 산상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백운산 꼭대기에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환상체험 끝에 경기만 섬 주민을 대상으로 한 8일간의 부흥회를 시작했다. 127명이 결신했다. 중촌교회 영종중앙교회 삼목도교회(현 인천공항교회) 예배당이 부흥회 후 건축됐다. 오지섭은 결신자를 두고 섬을 떠날 수 없었다. 백운산 아래 예배당에서 갈 곳 모르는 영혼을 추수했다. ‘백운당 오지섭’으로 불리는 계기가 됐다.

오지섭은 덕적도(당시 부천군)에서 태어나 덕적진 수군첨절제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학에 밝았다. ‘논어’ ‘맹자’를 일천 독한 한학자였다. 강화도 합일소학교 등에서 수학하며 기독교 문명 세례를 받았고 의정부농업중학교와 인천 영화전문학교 등에서 근대지식을 익혔다. 이런 그가 예수를 영접한 것은 1930년 1월 이용도(1901~1933·독립운동가) 목사의 덕적도 부흥집회에서였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이 목사의 말씀에 입문을 결심했다. 그때 같이 결신한 이들이 김광주(정동제일교회 목사 역임), 정재학(‘성결교회의 성자’로 불리던 서산중학 설립자) 등이었다.

오지섭은 덕적도 우포교회(현 덕적제일교회)를 섬기며 기독교 청년 지도자로 성장해 갔다. 1938년 소무의도 광양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폐쇄됐던 무의교회를 재건해 120여명의 교우를 얻기도 했다. 그때 혼자 학교 교실에서 예배를 올린다는 소식을 들은 서희순이라는 교인이 나타나 그의 손을 잡으며 “선생님, 예수를 믿으신다죠” 하며 울었다. 독립운동가 임병직(1893~1976·초대 외무부 장관)의 어머니였다. 서울 안동교회를 섬기던 임씨 집안은 독립운동 등을 이유로 탄압받자 그곳에서 사실상 숨어지내고 있었다. 무의교회는 덕적도에서 나무를 실어와 예배당을 지었다. 임씨 집안 등이 출석하며 자그마한 섬 주민 전부가 교인이 됐다.

그러나 혈기방장했던 오지섭이었다. 점자의 선구자 박두성 장로의 인천 율목동 집 사랑채에 거하며 내리교회를 섬기는 복음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노다지’, 즉 금광 사업에 몰두해 12칸 집을 구입할 정도로 부자가 됐다. 낙타는 바늘귀에 들어가지 못하듯 그는 파산했다. 그를 영종도로 피신시킨 하나님은 영종중앙교회 교인을 통해 다시 불렀다. 깊이 회개한 오지섭은 100일 기도와 단방(斷房) 그리고 잡인과의 면담 금지를 하며 성회 준비를 위한 씨름을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지막 시험을 했다. 이불을 3채나 덮어도 덜덜 떨게 하는 병마를 통해서였다. 부흥회를 준비하던 정성준 장로가 기가 막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오지섭을 일으켜 세웠다. “네가 죽을병에 걸렸느냐.” 청천벽력과 같은 큰 소리였다.

“주여 용서하소서.” 오지섭에게 영계가 열렸다.

오지섭은 영종중앙교회에서 전도사로 4년여를 목회하며 영종도가 서해 낙도와 열방을 향한 하늘 문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모든 물자와 인물이 제물포에서 서울로 향하고 있을 때 그는 뒤돌아서 서해를 바라보며 눈물로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한학자, 교육자, 웅변가, 공직자 등 어느 하나도 부족함이 없었던 그는 평생 낙도를 돌며 1800회의 부흥회를 이끌었다. 백운산에서 성령의 화침 맞은 불세출의 목회자였다.

그럼에도 교계에선 그를 ‘제2의 탁사’(정동제일교회 초대 한국인 목사 최병헌·한학자)라 불렀다. 하늘 문이 열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오지섭 목사 (1917~1999)
강화 합일학교와 감리회 대전신학교(목원대) 등에서 수학했다. 내리교회 권사, 영종중앙교회 전도사로 도서 순회 목회. 영종도 무궁화중학원 설립 및 인천 계명여중교 교감. 대부도 남리교회 등 25개 기도처·교회 설립 및 재건. 덕적도교회, 강화 온수리교회, 부천 오정제일교회 시무. 아들 오세종 목사(기독교고전번역원장) 등 슬하 손까지 28명(목사 22명, 전도사 6명)이 사역자.

인천=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