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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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모두가 비웃은 김치혁명

입력 2019-03-07 21:15:01






김장 경력 30년의 김혜순(56)씨는 지난해부터 김장을 담그지 않기로 했다. 김치냉장고가 갑작스레 고장이 나면서 애써 담근 김장김치가 너무 빨리 시어버리면서 상심이 컸다. 어쩔 수 없이 포장김치를 사서 먹었는데,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김씨는 “직접 담근 것처럼 맛있어서 놀랐다”며 “아들이 결혼하면서 며느리에게 부담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이제는 김장 노동에서 해방되고 싶어서 작년부터 마음 편히 사먹기로 했다”고 말했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포장김치가 50대 이상 주부들도 사로잡았다. 7일 대상㈜ 종가집 김치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김장철 설문조사 결과 50대 이상 주부의 56%가 “김장 계획이 없다. 포장김치를 사 먹을 것”이라고 답했다. 김장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수많은 여성들은 ‘김장 노동에서 해방’을 반기는 분위기다. 반면 포장김치 기술은 날로 발전해 지역의 특색있는 맛을 살려낸 다양한 김치가 출시되고 있다.

김씨의 포장김치에 대한 소감 중 ‘직접 담근 것처럼 맛있다’는 표현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 대규모로 생산되는 포장김치도 사람이 직접 담근다. 김치 전문가들이 조리법을 고안해내고, 숙련된 노동자들이 솜씨를 발휘한다. 포장 기술을 개발해 균일한 맛을 유지시키고, 유산균을 연구해 김치에 접목시켜 맛을 높인다. 유산균 연구는 발효과학 발전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50대 이상의 ‘김장 세대’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우리나라 포장김치의 역사는 30년 남짓 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우리나라 전통 음식인 김치를 해외에 알리기 위해 상품화를 추진한 게 지금에 이르렀다. 포장김치 시장의 확대는 끊임없는 연구·개발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호 포장김치를 내놓은 종가집 김치연구소와 함께 ‘김치 과학’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김치 맛 잡아주는 포장 기술

집에서 김치를 담가먹는 게 당연했던 시절, 김치를 상품화는 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김치 브랜드 종가집을 만든 대상은 2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골몰했다. 언제 어디서 먹어도 다르지 않은 ‘표준화된 맛’을 구현해내야 하고, 유통 기간 동안 맛이 변하지 않아야 했다. 김치의 상품화가 성공하려면 ‘맛을 잡아주는 기술’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1989년 종가집이 처음 획득한 포장기술 특허는 김치 상품화가 확대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치를 출시하는 데 난관이 됐던 건 ‘탄산가스’였다. 김치가 발효되고 숙성하는 과정에서 탄산가스가 발생하는데, 진공포장을 해도 포장재가 부풀어 올랐다. 이를 막기 위해 개발한 게 ‘가스흡수제’였다. 김치 포장 안에 담긴 가스흡수제는 탄산가스를 잡아줘 김치 고유의 맛을 오래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다. 유통과정에서 파손도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기술이었다.

다소 낯설지만 ‘캔 포장’ 기술도 개발됐다. 이동 중 냄새가 나지 않고 냉동 보관도 가능하다. 원양사업을 하는 기업 등에 수출돼 왔다. 최근에는 해외 여행객 증가로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관심이 확산되고 있다. 다만 포장김치만큼 맛을 구현해내지는 못 한다는 게 단점이다.

페트병 포장도 최근 각광받고 있다. 1~2인 가구의 증가, 야외활동을 즐기는 인구의 증가로 비닐이나 파우치 포장의 불편함을 해소해주는 페트병 포장김치 수요도 확대되고 있다. 보통 400g 이하의 소포장으로 판매된다. 종가집 김치의 경우 일본에서는 페트병 포장김치 판매가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유산균 배양으로 맛 업그레이드

유산균은 김치의 ‘효능’으로 주로 알려져 있다. 김치의 항균 작용, 항바이러스 기능은 김치유산균 덕이라는 것 정도는 한국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본 이야기일 테다. 김치유산균은 건강에만 좋은 게 아니라 김치의 ‘맛’을 좌우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김치 맛을 좋게 하고, 일정 수준의 맛을 유지하는 데 김치유산균이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종가집이 2005년 배양에 성공한 ‘류코노스톡 DRC0211’이란 이름의 김치유산균은 김치가 좋은 맛을 내면서도 쉽게 시지 않게 하는 유산균이다. 포장김치 맛을 살리는 데 톡톡히 도움을 줬다.

2011년에 개발한 ‘식물성 유산균 발효액 ENT’는 김치유산균의 활용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종가집이 개발한 이 유산균은 천연항균제로 미생물에 대한 강력한 항균효과로 유통기한을 최소 50% 이상 연장해 준다. 김치 외에 반찬류, 육가공, 두부류, 어묵류 등 신선식품뿐 아니라 화장품 등의 분야에서 합성첨가료 대체 상품으로 쓰이고 있다.

종가집 김치연구소와 한국식품연구원, 고려대 등과 공동연구로 2017년 개발한 ‘김치발효종균 DRC1506’은 김치생산종균으로 특허출원했다. 이 김치발효종균 연구 결과는 국제 미생물 계통분류학 분야의 저명한 학술지 ‘국제미생물계통분류학회지’에도 실렸다. 김치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억제에 효과가 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세기의 발명’… 수출길 콧노래

‘김치 과학’의 연구·개발 성과는 내수 시장 확대와 수출 증대로 나타나고 있다. 국내 포장김치 시장은 지난해 기준 1조4000억원 규모에 이른다. 최근에는 특히 가정용 포장김치 시장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CJ제일제당, 신세계푸드, 풀무원 등 식품 기업들이 가정용 포장김치 시장에 뛰어들면서 최근 3년간 20% 이상 성장했다.

해외 수출도 크게 늘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15년 7300만 달러였던 우리나라의 김치 수출은 지난해 9700만 달러로 수출 규모가 32%가량 늘었다. 오랫동안 김치는 일본이 주요 수출국이었는데 최근에는 종주국인 한국의 김치가 미국, 유럽, 아프리카, 남미 등으로까지 수출 지역을 확대하고 있다.

김치연구소 관계자는 “포장김치 시장의 확대는 국내 여성소비자들에게 겨울철 가장 고된 노동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운 ‘세기의 발명’으로도 꼽힌다”며 “김치의 다양한 맛을 꾸준히 개발하고, 더 맛있는 김치를 만들기 위한 연구와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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