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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의 감성노트]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기

입력 2019-03-09 04:10:01


김병수 정신과 전문의


지친 마음을 리프레시하려고 여행을 떠나지만, 솔직히 이게 가능할까. 이미 한국에서 찌들어버린 몸을 끌고 몇 시간씩 좁은 이코노미에 자신을 구겨 넣고 날아가 시차도 안 맞는 곳에서 적응해야 하는 것이 여행인데, 지친 마음이 여행으로 사라질 리 없다. 여행은 갔다 와도 문제다. 일을 다시 시작하려면 더 힘들다. 이런 괴로움을 뻔히 예상할 수 있는데도 우리는 틈만 나면 싸게 나온 비행기표를 찾아 인터넷을 뒤진다. 또 떠나고 싶어진다. 더 힘들어지더라도, 떠나고 싶어 한다. 중독이 따로 없다.

북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기대를 잔뜩 품었다. 헬싱키는 중간 여행지나 기착지로 몇 번을 반복해 갔지만, 본격적으로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을 묶어 여행한 적은 없었던 터라 그곳의 새로운 문화도 체험해 보고 싶었고, 디자인 소품을 사 와야지 하는 쇼핑 욕구도 컸다. 그런데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제일 좋았던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트레킹”이라고 답한다.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머물다 프레이케스톨렌에 가기 위해 작은 마을 스타방게르에서 하룻밤을 먼저 묵었다. 푹 자고 일어나서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바람이 좀 차가웠지만 기상이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잔뜩 먹구름이 끼었고, 툭 툭 툭 비도 떨어졌다. 빗방울이 꽤 굵었다. 아, 이런 낭패가 있나. 프레이케스톨렌을 오르려면 트레킹을 하고 산 위까지 오르는 등산도 해야 하는데 비를 맞으면서 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됐다. 포기하고 하루를 쉴까. 혼자라면 비를 맞고 등산하는 건 그리 큰일이 아닌데, 초등학생 딸을 데리고 간 터라 빗길에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됐다.

“그래도 가자. 일단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보고, 비가 계속 와서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그때 돌아오자. 비 때문에 갈지 말지 망설이기보다는 비를 맞고 걸어 본 뒤에 그만둘지 말지 결정하자.” 등산로 초입부터 비가 내렸다. 빗줄기는 굵었고 옷이 젖었다. 아우터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다. 배낭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다. 옷이 무거워지고, 빗물은 차가웠다. 트레킹 폴대를 쥔 손이 시렸다. 미끄러운 돌이 앞길을 막을 때 긴장했다. 그러다 중간에 해가 나왔고, 정상에 다가가자 비는 완전히 그쳤다. 가뿐한 마음으로 정상에 올랐다. 등산로가 험악하지는 않았지만 빗길에 초등학생 딸을 데리고 오르기에 그리 편한 코스는 아니다. 그래도 누구의 도움 없이 끝까지 올랐고, 정상에서 광대한 경외감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피요르가 만든 낭떠러지 절벽에 최대한 걸어가 보기도 하고, 살짝 점프도 해보고, 수백m 아래에서 흐르는 물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인생이란 뭘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렇게 정상의 기운을 만끽했다.

다음에 또 프레이케스톨렌에 갈 기회가 있을까. 없을 거다. 노르웨이를 다시 여행하더라도 다른 산을 오르고 다른 곳을 트레킹할 테니까. 만약 그날 비를 뚫고 가지 않았다면 내 인생에서 그때의 프레이케스톨렌은 영원히 없는 것이다. 비를 맞으며 도달했던 정상에서의 절정 체험은 그때, 그 순간뿐인 것이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냥 해야 한다. 먹구름이 끼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이 내리쳐도 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일단 해봐야 한다. 겁먹고 물러나버리면 똑같은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여행이든, 등산이든, 일이든, 연애든 그 무엇이라도 마음에 품은 일이라면 잘 될지 안 될지, 난관에 부딪힐지 아닐지 염려하지 말고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저질러야 한다.

중간에 폭우가 쏟아져서 더 이상 걸어갈 수 없다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그건 나와 맞지 않는 일이라서 그런 거다. 그 시간에 나는 그 일과 어긋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거다. 그런 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원래 이뤄지지 않게 이미 운명 지어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했는데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그런 일은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다.

삶에서 지금 아니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만날 때가 있다. 비가 오고 천둥이 쳐도 하고 싶은 일은 반드시 하고 넘어가야 한다. 다음에 기회가 다시 온다는 보장이 없고 똑같은 기회는 영영 다시 오지 않으니까. 모든 조건이 완벽하기를 기다리거나 상황이 안 좋다고 물러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만큼 일단은 해보겠다는 마음이 중요한 게 아닐까. 똑같은 기회는 앞으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테니까.

김병수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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