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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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완식의 우리말 새기기] 치우고 걷는 ‘설엊다’가 설겆이→‘설거지’로

입력 2019-03-02 04:10:01


새벽이슬 아롱진 울 밑 제비꽃 같았을 열아홉에 엄마는 우리집에 시집을 오셨다는데, 종가에 발을 ‘잘못’ 들인 뒤 넌더리가 날 만큼 한 게 있다 하셨지요. 수십 명이 먹고 난 많은 그릇을 끼마다 씻고 말리는 설거지였다고 합니다.

열두 달을 찬물로 세수, 빨래, 설거지를 하던 전방생활이 아직 아찔합니다. 두셋이서 하루 세 끼 부대원 숟갈 30여 개와 플라스틱 식판 30여 개를 스펀지에 빨랫비누 묻혀 닦는 일을 몇 달 하던 때가 있었지요. 한겨울 뻘건 돼지찌개 같은 반찬이 나온 날은 참으로 큰 낭패였습니다. 청결과는 당초 거리가 먼 설거지였지만 어디가 아프다고 한 사람은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설거지’는 ‘커튼을 걷다’ ‘소매를 걷다’처럼 늘어진 걸 말아 올리거나 열어젖히다, 또 ‘빨래를 걷다’ ‘돗자리를 걷다’같이 널거나 깐 것을 딴 데로 치우거나 한곳에 둔다는 뜻을 가진 옛말 ‘설엊다’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설엊’이 발음 편의상 ‘설겆’으로 변하고 행위를 이르는 ‘이’가 붙어 ‘설겆이’로 쓰이다 ‘설거지’로 연음돼 표준어가 됐습니다. 이북에서는 지금도 ‘설겆이’라고 한다지요.

설거지는 비가 오려고 하거나 올 때 비에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거나 덮는 것을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비설거지’라고도 하지요. 어릴 적 빨랫줄에 걸린 동생 면기저귀 같은 것이나 멍석에 널어놓은 고추, 목화 같은 게 비에 젖어 혼난 경험 없나요. 비설거지를 잘 해야 한다는 엄마의 신신당부를 잊고 놀다 깜빡했던 것인데.

우리의 내일에 결정적 영향을 줄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요. 깔끔하게 설거지하듯 마무리가 잘 돼야 합니다.

어문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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