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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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문록] 세상에서 강아지가 사라진다면

입력 2019-03-02 04:05:02


만약에 눈이 충혈되거나 컥컥 기침을 해서 병원에 간다고 가정해보자. 나이 든 강아지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인데, 그럴 때 찾아간 병원에서 안구건조증이나 결막염, 기관지협착 초기 증세라는 진단을 받는 대신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나에게 남은 날이 단 하루뿐이라고.

강아지 나이 열다섯이면 사람 나이로는 칠십이네 팔십이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우렁차게 짖어대고 기세 좋게 산책하는 건강한 강아지다. 요즘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칭찬, ‘동안(童顔)’이라는 말도 자주 듣는다. 그런 나에게 시한부 판정은 뜻밖의 소식일 것이다. 내 가족인 누나에게도 가슴 철렁 내려앉는 소리일 것이 틀림없다. 노령견인 나도 누나도 아직 생각하기 싫은 일이지만, 사람이든 개든 누구나 죽음에 대한 상상은 한두 번쯤 해두는 편이 좋다. 그러니 계속 오늘의 가정법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수의사가 말한다. “보리의 수명을 늘리는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제안한다. 내가 하루를 더 사는 대신 세상에서 무엇이든 한 가지씩을 없애야 한다고. 무엇을 없앨 것인가는 누나와 내가 상의해서 골라오라고.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누나는 어떤 대답을 할까. 나는 무엇을 원해야 하나.

나가이 아키라(永井聰) 감독의 일본 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은 서른 살 남자 주인공에게 이런 일이 닥쳤을 때 벌어지는 일에 관한 영화다. 주인공은 수명을 3일 연장했다. 대신 세상에 존재하던 것 3개가 사라졌다. 첫 번째는 전화이고, 두 번째는 영화이며, 세 번째는 시계다. ‘전화 따위가 사라진다고 누군가 죽는 것도 아니잖아?’ 주인공은 이 말에 수긍했고, 곧 세상의 모든 전화가 사라졌다. 전화가 사라지면서 통화를 하며 만났던 옛 여자 친구와의 추억이 함께 사라졌다. 영화가 사라지면서 세상의 모든 극장이 사라지고 영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친해진 친구와의 인연도 사라졌다. 전화는 그저 전화가 아니며, 영화는 단순히 영화인 것만은 아니었다. 시계가 사라지면, 삼십 년의 시간 동안 주인공이 맺어온 모든 ‘관계’들이 사라지겠지.

얼마 전 누나는 내게 인간이 일으킨 기후변화로 멸종된 최초의 포유류에 관한 뉴스를 전해주었다. 호주 북부 산호섬 브램블 케이의 고유종인 ‘브램블 케이 멜로미스’라는 작은 쥐가 호주 정부에 의해 공식 멸종 선언된 것이다. 기후변화로 멸종 위기에 몰린 동물은 여전히 많다. 먹이를 찾지 못해 러시아 북극해 인근 섬마을로 몰려온 수십 마리의 북극곰 사진은 강아지인 내가 봐도 충격적이었다. 해수면 상승으로 산란지 해안이 파괴되어 삶이 위태롭게 된 푸른바다거북이나 대왕고래, 페어리펭귄도 그리 여유로운 처지가 아니다. 세상에서 브램블 케이 멜로미스가 사라진 건 누군가의 수명을 하루 더 연장하기 위해서였을까. 북극곰이 위태로워진 건 삶을 연장하려는 이 세상 어느 존재의 절박한 소망 때문일까.

누나와 나는 결정했다. 비록 우리 수명을 하루씩 연장할 수 있다는 가정이라고 해도 세상에서 강아지나 고양이가 사라져선 안 된다고. 북극곰이나 펭귄도 사라지면 안 된다고. 눈에 쉽게 보이진 않지만 그들과 우리가 이 지구에서 맺고 있던 생태계의 ‘관계’가 하나둘 사라지게 둬선 안 된다고. 그건 세상에서 나와 내 가족이 사라지는 것만큼이나 슬픈 일일 테니. 심지어 누나가 싫어하는 검정콩이나 내가 진저리 치는 레몬도.

최현주(카피라이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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