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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필요한 건 곁을 돕는 인간애”

입력 2019-02-16 04:05:01
소설가 황정은은 매일 오후 1~2시간 여성 전용 헬스장에서 운동을 한다. 그는 “예전엔 방송 댄스를 배우며 활력을 얻었고 요즘엔 헬스로 근력을 단련하고 있는데 상당히 재미있다”고 말했다. 채널예스 제공 ⓒ이관형




“생각을 한다. 그러다 생각을 하지 않을 때 그렇게 무방비 상태일 때 황정은은 찾아온다. (황정은) 당신 너무 적나라하지 않아?” 작품 세계평이라고 하기엔 너무 직설적인 이 표현은 소설가 황정은(43)이 낸 연작소설집 ‘디디의 우산’(창비) 독자 리뷰에 나오는 말이다. 표지도 빨갛겠다, 에로물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개인의 일상 속에서 혁명과 연대의 의미를 탐구한 묵직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요즘 소설로는 드물게 출간 3주 만에 7쇄에 2만권을 찍을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황 작가는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국민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많은 분들이 읽어주셔서 놀랍고 감사하다. 독자들 리뷰를 보니 이 소설을 계기로 많은 분들이 그동안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를 조금씩 나누는 것 같아 좋다”고 했다.

작가는 내내 침착하면서도 부드러운 어조였다. ‘디디의 우산’은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2편의 중편을 묶은 소설집이다. 전자는 “사랑을 가진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남자가 그 세계를 잃은 뒤 마주한 절망에 대한 서사다. 후자는 광장에 나섰던 이들의 희망에 대한 묘사이다.

어쩌면 개인적 상실과 사회적 좌절감을 동시에 안겼던 2014~2017년을 겪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그는 “내가 쓴 소설 중 현실이 가장 강하게 반영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d’는 단편 ‘디디의 우산’(2010)을 “부숴 만든” 작품이다. 작가는 “(세월호 참사 후인) 2014년 가을, 누군가의 죽음 외에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작가는 ‘디디의 우산’ 속 사랑스러운 디디를 단편 ‘d’(2014·발표 당시 ‘웃는 남자’)에 등장시켜 불의의 사고로 숨지게 한다. 참사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황정은은 “종래 내가 쓴 소설 속 누군가가 파괴될 필요가 내게는 있었고, ‘디디의 우산’을 선택해 빚을 갚는 심정으로 중편 ‘d’를 쓰고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를 썼다”고 했다.

연작 ‘d’에서 연인 ‘dd’를 잃은 ‘d’는 방 밖으로 나와 세운상가에서 택배 일을 하고, 광장으로 나가 거대한 방벽을 맞닥뜨린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 화자 ‘나’와 서수경은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선다. 두 연작의 인물들은 혁명이라는 고리로 연결되면서 우연히 광장에 서게 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두 중편 사이에는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는 문장이 삽입돼 있다. 이 우산이 무엇을 의미하냐는 질문에 작가는 “인간애인 것 같다. 비가 내릴 때 내 우산만 챙기는 것이 아니고 옆 사람이 우산을 가지고 있는지 살피는 마음”이라고 했다. 소설을 읽으며 울었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 연민과 공감이 소설의 저류를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선고일을 기점으로 과거를 회고하는 형식이다. ‘나’와 서수경은 대학 시절인 1996년 고립과 폭력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작가는 세월호 참사 후 촛불 집회에 자주 갔다고 했다. 1996년 연세대 사태 현장에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대학 때 풍물패 동아리를 해서 집회 사전행사에는 많이 나갔지만 시위에 간 적은 없다”고 했다. 이어 “2016년 촛불집회 때 광장에 나가려고 상당히 노력했다. 두 차례 빼고는 모두 참석했다”고 했다. 그 시대가 우리를 광장으로 불렀고 어느 순간 우리 모두는 광장에 서 있었던 시절이다.

작가의 문장은 수식이 별로 없어 건조하고 단단한데 여기 배인 정서는 이상하리만치 애잔하다. 작가는 “매일 새벽 5시부터 아침 9시까지 글을 쓰고, 다시 오후 2시부터 저녁 6시까지 책상 앞에 앉는다.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9.3~9.5매를 쓴다”고 했다. 수많은 상념을 이야기와 문장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는 것이다. 황정은은 “그렇게 쓰고도 다음 날 반만 살리거나 아예 다 버리는 경우도 많다. 내가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써서 줄이고 또 줄여서 남은 문장 10%가 책에 나온 거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어떨 땐 책상 앞에 앉아 쓰는 게 너무 싫어서 울기도 한다”며 웃었다. 소설가에게도 글 쓰는 일이 때론 힘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설 쓰는 것을 좋아한다. “가급적 오래 소설을 쓰고 싶다. 소설을 쓰면서 늘 배운다. 단지 소설을 쓰고 있을 뿐인데도 뭔가를 배우곤 했다. 이 점이 가장 경이롭고 좋다”고 했다. 작가는 2017년부터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고 있고 차기작으로 가부장제하의 여성을 그린 작품을 쓰고 있다.

이 소설집이 과거의 아픔을 다시 후빌 수도 있겠으나 지난 시간의 상실과 기대를 기억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우산’과 같은 작품이 될 듯하다. 누군가의 말처럼 수십 년 후, 201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로 꼽힐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2005년 등단해 현대문학상, 신동엽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한 작가는 ‘百의 그림자’ ‘파씨의 입문’ 등으로 평단과 독자의 지지를 폭넓게 받고 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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