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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세상에 던진 존재의 물음

입력 2019-02-12 17:20:02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답을 찾을 수 없는 껄끄러운 질문 같지만 철학자 안광복씨는 이런 물음이야말로 “좋은 인생을 만드는 설계도”라고 말한다. 그림은 폴 고갱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1897).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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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온 격월간 문예지 ‘악스트’에 실린 소설가 장강명 인터뷰의 한 대목. 장강명은 “요즘 칼럼집, 에세이집이 많이 나오는데 책을 내기에는 굉장히 편리한 방법 같다. (하지만) 그런 작업은 안 하고 싶다. 그렇게 쓰면 실력이 안 늘 것 같다”고 말했다.

“가볍게 유산소운동을 하고 적당히 땀을 흘리면 즐겁죠. 하지만 근육을 키우려면 웨이트트레이닝으로 근육을 혹사시켜야 합니다. 근육은 망가졌다가 회복하면서 성장하거든요. 지금 쓰기에는 벅찬, 고통스러운 글을 써야 글쓰기 근육이 붙는다고 생각해요.”

소설가에게 긴 호흡의 장편을 탈고하는 게 웨이트트레이닝의 의미를 띤다면 철학자에게 그런 역할을 하는 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껄끄러운 질문을 거머쥐고 끝없이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나’ ‘내가 보는 것은 진실일까’….

‘나는 이 질문이 불편하다’를 펴낸 철학자 안광복(49)씨는 이들 질문을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좋은 연습문제”라고 규정하면서 이렇게 적어두었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중요하다는 외침은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상상력과 창의성을 펼칠 만한 일상을 살고 있을까. …낯설고 도발적인 물음에 맞부딪쳐야 평소에 쓰지 않던 정신의 잔근육들이 꿈틀거리며 굵어지지 않겠는가.”

안씨는 서울 중동고에서 20년 넘게 철학교사로 일하고 있다. 책날개 저자 소개란에는 이런 문구가 등장한다. “일상에서 철학하기를 실천하는 임상 철학자.”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웅진지식하우스)나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사계절) 같은 안씨의 저서를 일독한 독자라면 누구나 수긍할 만한 문구일 것이다. 그는 아침 운동을 하듯 매일 불편한 질문을 곱씹으면서 사는 사람이다. 프랑스 대입 논술 문제인 바칼로레아 문항을 놓고 씨름하거나, 조선시대 과거시험 문제인 책문(策問)을 놓고 답안을 작성해볼 때도 있다고 한다.

신작에서 그는 까다롭기 짝이 없는, 그래서 불편하게 여겨지는 질문 22개를 차례로 던진다. ‘나는 도대체 왜 살고 있나’ ‘정상적인 정신 상태는 ‘정상’일까’ ‘이기적인 국가가 조폭보다 나을 게 있나’ ‘인간으로 태어난 게 그리 대단한 일일까’ ‘기계를 학대하면 안 되는가’….

저자가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불편함이야말로 새로움과 발전의 어머니”라고 여겨서다. 그는 “상식에 강하게 맞서는 주장을 만났을 때 두뇌는 비로소 나태함에서 깨어난다”고 썼다. 그러면서 “근원적인 질문”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근원적인 질문을 삶이 틀어지고 병들었을 때에야 마주한다면 이미 인생을 바로 세우기 많이 어려워진 상태일 것이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나의 일상이 튼실하고 견고할 때 인생의 의미를 묻고, 일과 생활의 목표와 가치를 점검하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 한다.”

독자의 관심은 결국 난공불락처럼 여겨지는 갖가지 난제에 저자가 어떤 답변을 내놓는가에 모아질 것이다. 눈길을 끄는 내용 중 몇 개만 간추려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혼자인 시대, 굳이 친구가 필요할까’라는 질문부터 살펴보자.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관계의 양상은 달라지고 있다. 사람들은 SNS를 통해 누군가와 직접 만나지 않고도 관계를 꾸릴 수 있게 됐다. “사람 사이의 번거로움은 피하고 편리함만 취할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형태로 맺어지는 관계는 얄팍할 수밖에 없다고 거듭 말한다. 그는 “물 주고 가꾸는 수고 없이 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순 없다”고 했던 에리히 프롬의 명언을 끌어들인다. 정성과 애정이 꽃을 사랑하는 마음을 만들어가듯 인간관계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인간은 뭘 잘할까’라는 챕터도 주목할 만하다. 요즘엔 인공지능이 불세출의 바둑기사를 이기고 내로라하는 의사들의 의술을 뛰어넘고 멋진 음악까지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인간이 기계보다 잘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책을 읽으면 실감할 수 있는 게 철학의 위상이다. 인공지능이 모든 분야를 점령하더라도 철학자의 역할을 대신할 순 없다.

“(기계가) 자기가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와 이유를 알고 싶다면, 그네들은 인간에게 답을 물어야 한다. 기계가 인간보다 뛰어날지라도 그네들이 인류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인간적인 고뇌와 사색의 아름다움은 인공지능 시대에 더욱 빛난다. 인공지능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일이다.”

물론 철학적 질문에 딱 떨어지는 정답이 존재할 순 없다. 저자 역시 이런 사실을 모를 린 없으니 첫머리에 “어휘가 정확하고 논리에 흠잡을 데가 없다면 각자의 답안은 모두 모범답안”이라고 적어두었다.

어렵지 않게 읽히지만 가볍지 않게 느껴지는 내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근사한 철학 입문서다. 책을 읽고 나면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도 있겠다. 인간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되묻게 될 테니까.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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