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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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예수-이복녀] 집착·원망으로 힘겨웠던 섬 사역, 두려움 내려놓으니 모든 게 변했다

입력 2018-04-19 00:05:01
이복녀 전남 해남 어불도소망교회 사모가 18일 종교교회에서 18년 동안의 어불도 사역과 삶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전남 해남군 송지면의 어불도소망교회 전경.




“전 서울에 살고 싶어서 서울 토박이랑 결혼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땅끝에서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전남 해남군 어불도(於佛島)에서 18년째 살고 있네요. 섬 생활이 아니었다면 저는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고 고백하지 못했을 겁니다.”

18일 오전 7시. 서울 종로구 종교교회(최이우 목사) 예배실 강단에 오른 이복녀(63·어불도소망교회) 사모는 어불도에서의 삶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이날 이씨는 한국농어촌선교단체협의회(회장 소구영 목사)가 매월 셋째 주 수요일 오전에 진행하는 ‘농어민을 위한 기도모임’의 설교자를 대신해 강단에 섰다. 1년에 딱 한 번, 목회자가 아닌 사모가 농어촌에서의 사역과 삶을 전하는 특별한 날이었다.

섬 형상이 마치 부처가 앉아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어불도는 18년 전만 해도 정기적으로 굿판이 벌어졌다. 으레 기독교는 핍박받던 곳이었다. 이씨와 남편 장홍성(64) 목사가 처음 입도했을 때 교회는 허물어지기 직전의 폐허 같았다. 전임 사역자는 수개월 전 목회를 포기한 채 섬을 떠났다. 예배 처소보다 두 사람을 더 힘들게 했던 건 강퍅하기만 한 주민들의 태도였다.

“인사를 받아주기는커녕 고함을 지르며 욕을 쏟아내기 일쑤였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나 재수가 없다며 다짜고짜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죠. 5년이 지나도록 눈물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예배당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항구를 지날 때면 육지에 두고 온 두 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씨는 “시선과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단을 지키는 남편이 미워 보이고 이런 곳에 보낸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고 고백했다. 신앙적·정신적 외로움이 커져가던 2008년 결국 몸에 탈이 났다.

“어느 날 복통이 너무 심해 배를 만져봤는데 아기 머리만 한 혹이 손에 잡혔어요. 부랴부랴 전주에 있는 큰 병원에 갔어요. 자궁에 15㎝짜리 근종이 생겼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버텼냐고 의사가 놀라더군요. 결국 자궁적출수술을 하게 됐습니다.”

이씨는 “병상에서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동안 처음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했다”며 “상황에 집착하고 원망만 늘어놨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사역에도 변화가 생겼다. 주민들의 부정적 시선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그들의 일상에 조금씩 다가섰다. 장 목사는 군 복무 시절 자동차 정비를 맡았던 경험을 살려 고장 난 보일러와 농기계 등을 고쳐주며 마을에 없어선 안 될 재주꾼으로 변모했다.

이씨는 “저희만 보면 손가락질하던 주민들이 수년 전부턴 성탄절 새벽송을 돌 때 헌금까지 쥐여주며 기도를 요청한다”면서 “그날 새벽별을 보며 흘린 기쁨의 눈물이 잊히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지난해 12월 무릎 연골이 닳아 수술받을 때였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씨의 손을 잡으며 “사모님이 어불도가 복 받을 수 있게 매일 무릎 꿇고 기도해 주시다가 병까지 얻었다”며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가난한 어촌이었던 어불도는 최근 김과 전복 양식 사업이 급성장하면서 귀어(歸漁)하는 젊은 가정과 신축 건물이 늘어나는 등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입도가 늘면서 주민이 130여명에서 200여명으로 늘었다. 고령의 성도 2명과 첫 예배를 드렸던 교회엔 이제 성도 20명이 넘게 모인다. 그중 7∼8명이 어린이다. 이씨는 “18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부부의 소망엔 변함이 없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 목사님과 제 사역이 멈추더라도 어불도에 십자가가 스러지지 않도록 복음의 확신이 있는 사역자의 걸음이 필요합니다. 저희는 그때까지 디딤돌을 닦고 또 닦아 둘 겁니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그래픽=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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