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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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황주리의 나의 기쁜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

입력 2017-11-17 18:25:01
황주리 그림


인간이 만든 가장 인공적인 아름다운 도시를 들라면 나는 미국 라스베이거스를 들겠다. 세상에서 가장 낯설고 화려한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처음 가본 건 이십 년 전쯤이었다. 카지노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나는 기대하지 않고 우연히 들른 그 도시에 첫눈에 반했다. 반짝이는 낯선 혹성 같은 그곳에서 나는 마치 외계에 불시착한 어린왕자처럼 신비로운 기분에 휩싸였다. 그때 어느 호텔에 묵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가는 곳마다 각기 다른 콘셉트의 화려한 호텔들이 열기를 기다리는 거대한 크리스마스 선물상자처럼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 하룻밤 동안 이 호텔로 저 호텔로 뛰어다니며 내가 본 세계는 결코 잊지 못할 인공의 천국이었다.

올가을 그곳에 다시 간 나는 훨씬 더 화려해진 인공의 천국을 한 나흘 동안 느긋이 구경했다. 예전의 좋은 호텔들 중에는 낡은 호텔로 변한 곳들도 있고, 기상천외한 실내 장식을 뽐내는 새 호텔들이 눈부시게 자리 잡았다. 시저스 팰리스 호텔 천장의 장엄한 하늘은 여전히 고풍스러운 이미지를 자랑하고 있었고,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 쇼도 베네치안 호텔의 화려한 베네치아 분위기도 옛날의 정취를 잃지 않은 채 여전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그때는 없었던 파리지앤 호텔이나 뉴욕뉴욕 호텔 등 각 도시의 이미지를 콘셉트로 만든 호텔들도 눈에 띄었다.

남쪽 끝에서 북쪽 끝으로 순환하는 모노레일을 타고 호텔마다 내리면서, 엉뚱하게도 나는 만화 ‘설국열차’를 떠올렸다. 얼어붙은 사막이 되어버린 지구에서 마지막 생존자들이 설국열차에 몸을 싣고 철로의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달리며 순환한다. 화려한 열차 칸에 머무르는 힘 있는 자들과 열악한 꼬리 칸에 머무르는 약자들 간의 끝없는 냉혹한 생존 전쟁이 벌어진다.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중심인 스트립 거리에 고급 호텔이 몰려 있고, 마치 긴 설국열차의 꼬리 칸처럼 끝 쪽으로 갈수록 시설이 낙후된 호텔들이 모여 있는 기분이 들어서였을까?

사실 나는 밝고 화려하고 눈이 번쩍 뜨이는 영상 이미지들로 장식된 최고급 호텔들뿐 아니라 낙후된 시설의 호텔들을 돌아보는 게 더욱 재미있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과거로 떠나는 여행 같았다. 낙후된 옛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써커스 써커스’ 호텔은 마치 꿈을 꾼 것 같은 백일몽을 선사했다. 어릴 적에 읽은 먼 나라의 동화 속에서나 있을 이해할 수 없는 놀이기구들과 난삽한 도박 기구들이 인상적이었다. 어린이들을 위한 콘셉트로 만들어진 그 호텔은 너무 낡은 채 그대로 두어 기괴한 이미지를 풍겼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그려진 오래된 동전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뒤진 골동품 같은 기계들과, 피에로 분장을 하고 옛날 식 마술을 하고 있는 늙수그레한 남자의 모습은 마치 흑백 무성영화를 보는 듯 오랜 기억을 일깨웠다.

이집트 문명의 콘셉트로 만들어진 굉장히 웅대한 룩소 호텔로 들어섰다. 마치 수성에서 금성으로 19세기에서 22세기로 건너뛰는 것 같은 라스베이거스 호텔 여행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끝없는 상상의 여행이 된다. 룩소 호텔에서 만달레이베이 호텔로 이어지는 통로를 걸어 그곳 상가에서 한참을 거닐었다. 예전에는 화려했을 그곳은 새 호텔들에는 없는 오래된 골동의 이미지를 지닌 상품들도 눈길을 끌었다.

비싸지 않고 묵을 만한 호텔이다 싶었던 만달레이베이 호텔을 거닐었던 그날 오후부터 이틀 뒤, 그 호텔 콘서트장에서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로 돌아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를 듣고 경악했다. 범인은 전과도 없고 재산도 있는 64세의 외로운 늑대, 특정 조직이나 이념과 관계없는 세상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찬 자생적 테러리스트라 했다. 피해를 극대화하기 위해 미국 최고의 관광 도시 라스베이거스의 인파가 밀집된 공연장을 선택했다는 뉴스를 듣고, 히틀러의 후예들이 곳곳에 출몰하는 엽기적인 시대가 도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호텔에서 서성이는 동안, 범인은 32층 호텔방에 머무르며 살인 계획을 세웠을 것이라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라스베이거스를 떠나기 전, 현지 주민들이 더 찾는다는 오리지널 다운타운의 보행자 거리, 프리몬트 거리에 가서 70년대 식의 반짝이는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빛의 향연 속에 한동안 서 있었다. 유서 깊은 호텔 ‘골든 너겟’에서 중국음식을 먹는데, 중년의 중국인 웨이터가 음식을 나르면서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한국인 애인에 관해 탄식하듯 들려주었다. 라스베이거스에 한동안 살다가 고향인 서울로 돌아가는 기분으로 그날 밤 비행기를 탔다.

황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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