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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황주리의 나의 기쁜 도시] 뉴욕에서 다시 삶을 생각하다

입력 2017-10-20 17:30:01
황주리 그림


서울이 내 고향이라면 두 번째 고향은 뉴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삼십대가 고스란히 그곳에서 흘러갔다. 누구라도 그 나이엔 그냥 흘러가는 삶에 대한 관조를 즐기지 못한다. 외롭고 괴롭고 누가 쫒아오는 듯 불안하고, 원하는 바를 빨리 이루려는 마음에 새벽까지 깨어있던 서른 살에 나는 뉴욕 맨해튼에서 매 순간 자신과의 전쟁을 치렀다. 내가 십여년을 살았던 곳은 바로 곁에 세계무역센터가 굳건히 서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아파트 25층이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나 잠들 때나, 나는 매일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 속에 가장 낯익은 조형물의 이미지는 서른 살에 본 자유의 여신상과 초등학교 시절부터 보아온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다. 가끔 산이 없는 맨해튼에서 내가 그리워했던 건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광화문과 이순신 장군 동상이었다.

뉴욕을 떠나온 지도 정말 많은 세월이 흘렀고, 가끔 내가 꿈에서도 그리워하는 풍경은 매일 안녕을 고했던 자유의 여신상과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거짓말처럼 무너져버린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의 풍경이다. 2001년 9월 11일 생일 이틀 전날 저녁, 마침 서울에 나와 있던 나는 TV 속보를 보면서 경악했다. 이 믿을 수 없는 일을 멀리서 지켜보는 일은 내게 세상에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한 시간쯤 뒤에는 한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삼십분 뒤에는 다른 건물도 완전히 붕괴되고, 우리 집 옆 건물인 ‘월드 파이낸셜 센터’도 서서히 힘없이 폭삭 주저앉았다. 이후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살기도 가기도 싫어졌다. 서울로 돌아온 뒤 나는 뉴욕에 갈 일이 있으면서도 자꾸만 여행을 미루었다. 왠지 내 소중한 젊음이 그곳에서 폭격을 맞은 기분이라 할까?

마침 올가을 16년 전 그 사건이 터졌던 즈음 가끔 전쟁의 불안에 시달리며 어느 새 예순 살 생일을 맞은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내 서른 살 시절을 보냈던 뉴욕으로 향했다. 육십에 삶을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다시 찾은 뉴욕은 너무 많이 달라졌고, 한편으로는 하나도 변함이 없이 그대로 있었다. 완전히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자리엔 새로운 건물들이 튼튼하게 다시 들어섰고, 그날의 희생을 추모하는 거대한 메모리얼 박물관이 세워졌다. 박물관에 들어가 그 깊은 슬픔의 기억들을 거대한 예술적 저장고로 만든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납치된 비행기 속에서 가족을 향한 전화 속 마지막 목소리들도 생생히 남아있었다.

너무 변해버린 내가 살던 동네에서 한참을 맴돌다가 밤에 강가에 나가 하나도 늙지 않은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았다. 감정에 복받쳐 소리 내 ‘안녕’ 하고 인사를 보냈으나 너무 오랜만에 왔다고 삐친 오랜 친구처럼 그녀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엔 다운타운의 휘트니 미술관과 근처에 새로 생긴 하이라인 파크를 거닐었다. 주변 환경을 그대로 살린 채 공중에 파크를 만든 그곳은 참 뉴욕다운 곳이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그대로 살린 예전에는 없었던 첼시마켓을 돌아보고 갤러리들을 돌아본 뒤, 저녁 무렵에 미드타운 쪽으로 걸어 올라가다 보니 예전에는 없는 듯 무시하고 다녔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해가 저물고 캄캄해질수록 그곳은 멀리서 가까이서 갖가지 색깔로 신비스럽게 빛을 발했다. 그 시절 한국에서 온 손님들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가자고 할 때마다 볼 것도 없다며 거절하기 일쑤였다. 마치 대학 시절 유행하던 포크송만 좋아하고 절절한 트로트 노래들은 돌아보지도 않던 겉멋이 잔뜩 든 마음에 비유할 수 있을까? 실로 오랜만에 본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우수에 찬 빛과 그림자는 참으로 뉴욕을 대표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루프 탑 카페에 올라가 눈앞에 오색 불빛으로 휘황하게 빛나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건배하며 맥주 한 잔 마시는 기분은, 외롭고 젊었던 시절에는 누릴 수 없었던 정신의 여유였을지 모른다.

호텔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은 예전이나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수많은 인종들이 뒤섞인 퀴퀴하고 숨이 막히는 공기 속에 하나도 고치지 않은 채 늙어가는 지하철은 반갑다기보다는 그 옛날의 고독을 일깨웠다. 문득 오십 세가 넘어서 뉴욕으로 건너와 십여년 그림그리기에 혼을 다 쏟다가 세상을 떠난 화가 ‘김환기’를 떠올렸다. 그가 타던 때나 지금이나 뉴욕의 지하철은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이제 젊을 때처럼 뉴욕과 다시 사랑에 빠질 것 같지는 않다. 그곳에 두고 온 젊음을 만나본 뒤 아쉽게 떠나는 마음은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내 남아있는 삶의 목소리였다.

황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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