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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금미의 시네마 패스워드-‘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 고단한 불혹의 가장… 그에게 삶의 위로를

입력 2017-09-24 18:50:01

 
지난 21일 개봉한 벤 스틸러 주연의 미국 영화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에서 나란히 길을 걷고 있는 브래드(왼쪽)와 아들 트로이. 영화사 진진 제공


제목에 이끌려 홀린 듯 극장으로 들어섰다. 가끔은 ‘괜찮아’라는 한마디가 마음을 순식간에 무장해제 시키기도 하니까.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는 ‘브래드의 처지(Brad’s Status)’라는 원제를 번안한 제목이다. 롤러코스터의 곡 ‘힘을 내요 미스터 김’에서 영감을 얻은 것일까. 아무튼 위로가 필요한 이 시대에 꽤 영리한 선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미국에 사는 40대 중반 백인 남성 브래드씨의 처지는 어떤가. 사랑하는 아내와 대입을 앞둔 아들이 있고, 공익을 위한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직업적 자부심도 있다. 그럭저럭 평온하던 일상 속에서 그는 문득 벼락같은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내가 지금까지 이뤘다고 믿은 게 사람들에겐 그저 하찮은 것일 뿐일까?”

불안하고 초조해진 그는 잠을 못 이루다 아내를 깨워 장인이 죽으면 유산을 얼마나 받게 될지 물어보기도 하고, 전엔 관심을 두지 않던 아들의 입시에도 갑자기 욕심이 생겨 어떻게든 명문대에 보내고자 안달을 하게 된다. 잘 나가는 대학 동기들의 화려한 삶을 SNS와 텔레비전을 통해 접하며 질투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불혹’이라 일컫는 40대. 그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을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가장 많이 회의를 품게 되는 때다. 그러니 ‘불혹’이라는 단어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보다는 지나친 불안과 근심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일 테다. 금전과 자식의 진로에 대한 강박, 자괴감과 질투심, 젊음과 로맨스에 대한 은밀한 욕망 등 브래드의 내면은 때로 낯간지러울 만큼 시시하고 직설적으로 그려지지만, 중년의 갈등과 고민은 지구 반대편에서도 비슷한 모양새라 헛웃음을 짓게 한다.

‘스쿨 오브 락’ ‘나쵸 리브레’ 등 코미디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배우로 활동해왔던 마이크 화이트의 첫 장편영화로, 이달 열린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던 작품이다. 아들 트로이가 입시를 앞두고 동부 아이비리그의 대학들을 견학하는 길에 브래드가 동행하며 겪는 며칠간의 짧은 여정을 담백하게 그렸다.

이 소소한 저예산 영화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생동감 있는 캐릭터와 배우의 조합이다. 주인공 브래드 역을 맡은 벤 스틸러는 이제 ‘미트 페어런트’ ‘박물관이 살아있다!’ 등의 좌충우돌 코미디에서 확실히 벗어나 삶의 원숙한 깊이를 드러내는 얼굴을 지닌 배우로 자리 잡게 된 듯하다. 아들의 친구로 이미 하버드에 재학 중인 재기 발랄한 여대생 아나냐(샤지 라자)는 내적 갈등을 겪는 브래드와 대비를 이루며 극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과거의 자신처럼 사회 변화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그녀를 통해 브래드는 젊은 시절 꿈꿨던 이상을 되돌아보게 된다. 속물적 욕망과 타인의 평가에 압도되어 좌절하고 괴로워하던 그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린다. “괜찮아, 세상을 가질 순 없어도 사랑할 순 있으니까.”

프랑스 영화의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는 “내가 삶을 사랑했다면 결코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 우리는 삶을 사랑하기에 영화를 통해서도 계속 보기를 원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현실의 삶이 고되고 힘들어서 영화 속으로 피신하기도 한다. 조금 시시한 이야기여도 괜찮을 것이다. 작은 위안과 함께 다시 세상을 사랑할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여금미 <영화 칼럼니스트·영화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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