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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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김재열 뉴욕센트럴교회 목사(5)직분자들이 목사 흉보는 모습에 실망

입력 2020-11-18 07:31:16
김재열 뉴욕센트럴교회 담임목사가 1968년 서울 필동 모교회 전도사 시절 중고등부 야외활동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선교사님이 내민 종이는 대학 입학원서였다. “미스터 김이 대학에 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후원하겠습니다.” 그리고 맨 밑에 보니 서울대학이라 적혀 있었다.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서울대 진학의 길을 열어주시는구나.’ 지장을 찍고 자세히 보니 서울대가 아니라 서울신학대였다. 며칠 후 입학시험을 치고 서울신대에 합격했다.

의류 도매상하는 친구돕다 아예 떠맡아
기도만 하면 "주의 종 되라고 불렀는데~"


1967년 아현성결교회 옆에 있던 서울신대에 입학했다. 선교사님은 2년간 신학대 학비와 용돈을 지원해 주셨다. 입학하고 보니 신학생들이 하나같이 우중충했다. 젊은이인데도 세상의 고민을 다 짊어진 것처럼 어두웠다. ‘뭐야, 신학생들이 이렇게 힘이 없어도 되는 거야. 영 마음에 안 드네.’

신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서울 필동의 모 교회 교육전도사로 부임했다. 중고등부 전도사였는데, 몇 년간 아주 재미있게 사역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 권사님과 집사님들이 모여 목사님 흉을 보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니, 나도 이제 얼마 후 저 길을 가야 하는데 성도들로부터 저런 이야기를 듣는 자리이란 말인가. 차라리 저런 욕을 듣느니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평신도가 낫겠다. 저런 교인으로부터 사례비를 받고 일평생 어떻게 사나.’

만감이 교차했다. 목회자들의 모습을 보며 신학에 대한 회의감까지 몰려들었다. 그래서 덜컥 자퇴서를 내고 말았다.

1971년 대도백화점 여성의류 도매상에서 일하던 친구한테 찾아갔다. 친구는 칼빈대 총장을 지낸 김재연 목사였다.

“어이, 김재열 전도사, 다음 한 주간 여기 와서 가게 좀 보는 게 어때.” “왜.” “응, 조만간 미국 유학을 떠나려는데, 서류 수속을 밟으려면 대사관에 가야 하거든. 가게 좀 봐.”

잠깐 가게를 보는데 그렇게 큰돈은 처음 봤다. 당시 풀타임 전도사의 월 사례가 6만원이었는데, 그날 하루 매상이 100만원이었다. 지금 돈으로 하면 2000만원이 넘는 돈이다. 정말 돈을 자루에 쓸어 담았다.

일주일 뒤 친구가 왔다. “너 이민 가면 이 가게 누구한테 넘길 거냐.” “어, 아직 임자가 나타나지 않았어. 니가 한번 해볼래.” “응, 내가 할게.”

그렇게 허름한 집을 담보 잡아 사업을 시작했다. 7년간 사업을 했는데, 돈을 엄청나게 벌기도 하고 망하기도 했다. 부침이 정말 심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심정이었다.

돈을 꽤 많이 벌 때였다. 장사는 잘되고 있었지만, 기쁨이 없었다. 특히 기도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내가 널 평신도로 부르지 않았다. 주의 종이 되라고 불렀는데 도대체 뭘 하는 것이냐.”

부르심에 대한 부담을 안던 중 1974년 아내를 만났다. 어머니가 교회에 다니는 자매를 소개해줬다. ‘여자는 여자가 제일 잘 안다. 특히나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어머니가 선택한 여자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여자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내가 결혼을 일사천리로 진행한 것은 어머니에 대한 신뢰가 컸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내를 앉혀놓고 이야기했다. “여보, 나 도저히 안 되겠어.”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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