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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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재열 뉴욕센트럴교회 담임목사(1)고3 때 폐결핵으로 피 토하고 쓰러져

입력 2020-11-11 10:23:51
김재열목사가 미국 뉴욕 부촌인 올드 웨스트베리에 있는 뉴욕센트럴교회 앞에서 이민목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나의 고향은 전남 순천이다. 1947년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찰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나 여자상업고를 나와 현지 백화점 경리로 일하다가 한국에 와서 중매로 아버지를 만났다.

순천역 근처에서 살다 보니 6·25전쟁으로 다친 군인들이 이동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간호사가 되어야겠다는 꿈이 있었다.

우리 집은 기독교 신앙이 없는 가정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머리가 노랗고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 한 가정이 하늘색 랜드로버 차량을 타고 왔다. 어린 시절 미국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저 사람들은 잘 사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전쟁으로 무너진 한국, 전라도까지 온 것일까. 어쨌든 나도 저들이 온 미국에서 꼭 살아보고 싶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유진 벨 선교사의 후손으로 지역 개척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때로부터 50년이 지나 미국 뉴욕에서 한인교회를 담임하며 주일 유진벨재단 회장인 스티브 린턴 선교사를 초청해 간증을 들었다. 그런데 자신의 고향이 순천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니, 그럼 그때 하늘색 랜드로버를 타고 우리 동네를 찾았던 사람들이 당신 가족이었어요?” “오우,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이후 블랙마운틴에 거주하는 생존한 선교사 가족들을 만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정담을 나눴다.

순천중앙초등학교 재학시절 아버지는 자유당 소속으로 시의원을 했다. 중학교 1학년이 됐는데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났다. 민주당 인사들이 자유당 인사들을 습격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렸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서울로 급히 거주지를 옮기게 됐다.

서울 집은 남산 밑자락이었다. 숭실중·고등학교에 다녔는데 미션스쿨이었다. 그때부터 예수를 만나는 축복이 시작됐다. 중학교 때 학교에서 성경은 배웠지만, 교회 출석은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서소문에 있는 평안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했다. 그러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운동을 하다가 다쳤는데 늑막염이 생겼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어느 날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폐결핵이었다. 결국, 국립마산결핵요양원으로 가게 됐다.

수용된 환자들은 거의 말기 환자였다. 중증 환자들이 한 달에 4~5명씩 죽어 나갔다. 오밤중에 각혈하는데 피 냄새가 정말 역겨웠다. 18세 청소년 입장에서 죽음을 실감한 때다. ‘나도 저러다 죽는 것인가.’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무료한 생활을 하다가 ‘박군의 심정’이라는 전도지 한 장을 봤다.

약력=총신대 졸, 합동신학대학원대 석사, 미국 뉴욕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 서울 산성교회 개척, 캐나다 토론토 열린문교회 담임,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 총회장, 현재 국제씨드선교회 명예 이사장,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담임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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