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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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장식 (2) 삶이 곧 신앙인 어머니의 모범과 감화로 믿음 키워

입력 2021-06-09 03:10:01
이장식 교수 어머니 박봉금(가운데) 여사가 아들 내외 및 손주들과 함께 1965년에 찍은 가족사진.


나는 1921년 경남 진해 동쪽 해안에 위치한 덕산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조그만 마을이었다. 내가 다섯 살쯤 됐을 때 일본 군부는 우리 마을 대부분의 집을 철거시키고 거기다 비행장을 만들었다.

그런 우리 마을 옆으로 약 25리쯤 떨어진 곳에 경화동이라는 꽤 큰 동네가 있었다. 그곳엔 내가 다니던 경화교회가 있었다. 1905년에 설립된 진해에서 유일한 교회였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불신자 가정에 시집오면서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갖고 왔다. 그러나 할머니는 어머니가 교회 다니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조상 대대로 살던 의령에서 벗어나 삼대독자인 아버지를 데리고 홀로 진해 덕산으로 건너왔다. 친척도 없는 타지로 이사해서 살면 아들의 명이 길어진다는 말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이따금 무당을 불러 속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위해 굿을 하기도 했다.

그 시절 조선의 문화가 그러했지만, 아버지의 병은 낫지 않았다. 약값만 밀려갔고 우리 집 살림은 궁해 가기만 했다. 어머니는 마을 아주머니들과 함께 채소장사를 시작했다. 아침 일찍 진해 시가에 가서 채소 도매상에게 채소를 산 뒤 일본인 집을 찾아다니며 행상을 했다.

이 가운데서도 어머니는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는 먼저 교회부터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조금씩 우리 가정을 변화시켰다. 어머니는 경화교회를 나가면서 아버지를 전도했다.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 때 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 참석했는데 이때 믿음의 싹을 틔웠다. 당시 사경회 강사는 이기선 목사님이었다. 이후 아버지는 세례를 받았고, 할머니도 이따금 교회에 나가게 됐다.

어머니는 채소 행상으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면서 교회의 집사 직분을 충성스럽게 이행했다. 교회 사경회 기간이면 어머니는 장사를 쉬고 새벽기도회부터 종일 집회에 참석했다. 강사 목사님 식사 준비는 언제나 어머니 몫으로, 어머니 스스로 마르다의 직책을 자처했다.

어머니는 조용한 신앙인이었다. 기도할 때도 울거나 큰 소리 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장사 일이 고되다든지, 돈이 없다든지, 살아가기 힘들다든지 하는 말씀을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 장래에 대한 당신의 희망 사항 같은 것도 말씀한 적이 없었다. 가끔 “의인이 버림받거나 그 자손이 걸식하는 일이 없다”는 시편 37장 25절 말씀을 읊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말로써 나에게 신앙을 가르쳐주거나 주입시키지 않았다. 나는 그저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그분의 모습을 보며 믿음을 키웠다. 이때의 경험 때문인지 나는 종교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모범과 감화로 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성미를 열심히 모아서 성경, 찬송책과 같이 책보에 싸서 주일날 교회에 가는 것이 어머니의 유일한 나들이였고 즐거움이었다. 내가 열 살 때 아버지가 마흔 살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교회는 어머니의 울타리가 되고 힘이 돼 줬다.

그 시절 교회는 조선총독부의 억압과 일본 경찰의 경계 아래서 실로 쫓긴 자들을 하나님이 모으신 곳이었다. 특히 우리 가족에게는 참새와 제비 새끼가 집을 지어 사는 보금자리와 같은 곳이었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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