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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시대다] 욘사마·지우히메, 한류 열풍을 일으키다

입력 2020-10-24 04:10:01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은 KBS 드라마 ‘겨울연가’(2002년)는 한류 열풍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배용준(사진 왼쪽)과 최지우는 각각 욘사마와 지우히메로 불리며 한류 스타로 발돋움했다.
 
박솔미, 故박용하도 한국을 넘어 일본에서까지 큰 인기를 누렸다(사진 왼쪽부터). K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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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서울 중앙고등학교 앞 중앙상회에 가면 ‘욘사마’, ‘지우히메’의 브로마이드가 걸려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는지 이제는 희끄무레해졌지만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지각할까봐 언덕을 뛰어 내려오던 정유진(최지우)과 지각 따윈 상관없다는 듯 정문 앞 전봇대에 기대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던 강준상(배용준)이 보이는 듯했다. 2002년 방송한 KBS 드라마 ‘겨울연가’는 첫사랑에 대한 슬픈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서로의 마음이 제일 좋은 집이잖아요” “사랑은 양보하는 거 아니야” “마음에 묻은 사람은 영원히 잊지 못하는 거야” 등 주옥같은 사랑의 명대사를 남긴 ‘겨울연가’는 ‘가을동화’에 이은 윤석호 PD의 두 번째 계절 드라마였다.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치명적인 운명 때문에 더 절실할 수밖에 없는 첫사랑, 이를 소재로 한 ‘겨울연가’는 복고적 순애보의 결정체였고 새천년 한류 열풍의 출발점이었다.
 
감성으로 포장된 첫사랑은 감미로웠다

춘천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 전학 온 준상은 첫 등굣길에서 유진을 만났고, 같은 반이 된 그들은 서로에게 첫사랑이 되었다. 설렘은 짧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준상이 죽고 유진과 친구들은 그를 가슴에 묻어야 했다. 10년 뒤, 인테리어회사를 운영하는 유진은 김상혁(박용하)과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오채린(박솔미)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렇게 고교동창들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이들 앞에 준상을 닮은 한 남자가 나타났다. 유진의 회사에 스키장 리노베이션을 의뢰한 이민형, 그는 누가 봐도 준상이었다. 유진의 마음은 흔들렸고 상혁은 불안했다. 불안하기는 채린도 마찬가지였다. 준상을 짝사랑했던 그녀는 유학 시절 만난 민형에게 홀린 듯 빠져 연인사이가 되었으니, 상혁이나 채린이나 온 힘을 다해 지금의 사랑을 지키고 싶었다.

사실 엇갈린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새로울 것도 없지만 ‘겨울연가’는 기억상실증, 출생의 비밀, 불치병으로 이어지는 삼단 반전을 통해 이 사랑을 애절하게 만들어냈다. 기억상실증은 유진과 민형이 서로에게 끌리며 상혁과 채린을 외롭고 힘들게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면죄부였다. 자신이 의도한 것도 아니고 사고로 기억을 잃은 아들을 위해 준상의 어머니가 꾸민 일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민형이 준상의 기억을 되찾으며 유진과 재회하자 시청자들은 이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재회는 잠깐이었고 출생의 비밀이 뒤를 이었다. 사랑도 대물림을 하는지 준상, 상혁, 유진의 부모들은 대학 시절 절친이었고 묘한 삼각관계의 당사자였다. 맺어지진 못했지만 준상의 어머니와 유진의 아버지가 약혼자 관계였으니 준상과 유진이 남매일 거라는 의혹은 타당한 면이 있었다.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준상 어머니의 침묵 때문에 유진과 준상은 또다시 눈물의 이별을 하게 된다. 이때 미심쩍었던 자신의 과거를 확인하고자 유전자 검사를 한 상혁 아버지로 인해 준상과 상혁이 이복형제임이 밝혀진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타는 불치병이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뇌혈종이 생긴 준상은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고 실명할 수도 있어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기억을 잃을 수 있다는 말에 포기한다. 전작이었던 ‘가을동화’에서 은서(송혜교)와 준서(송승헌)가 모두 죽었던 것처럼 비극적 사랑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준상의 죽음이 필요했겠지만 시청자들은 운명이 이들을 갈라놓지 않길 원했다. 결국 ‘겨울연가’는 시력은 잃었지만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준상이 유진과 재회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겨울연가’는 매회 2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최고 시청률 28.8%까지 상승하며 화제가 되었지만 출생의 비밀과 불치병은 ‘가을동화’의 연장 같았고, 우연의 반복은 과하지 않냐는 지적을 받을 만큼 잦았다. 그래도 순수한 사랑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세련된 연출과 극적인 구조, 아름다운 영상,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명대사, 애절하게 가슴을 울리는 OST, 그리고 뛰어난 연기력의 배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욘사마 신드롬, 일본 강타

중화권을 중심으로 ‘질투’, ‘별은 내 가슴에’(이상 MBC) 등이 화제가 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한국 드라마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사랑이 뭐길래’(MBC)가 중국 CCTV에 방송되며 인기몰이를 했던 1997년으로 본다. 당시 평균 시청률 4.3%로 CCTV 수입 드라마 시청률 2위를 기록했고 기대 이상의 성과는 한류 확산의 촉매제가 되었다. 여기에 IMF 외환 위기로 절박한 위기감이 팽창했던 대중문화업계가 본격적으로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선 결과 2002년 방송 프로그램 수출입 실적은 흑자를 기록했다.

‘겨울연가’는 전작인 ‘가을동화’의 성공에 힘입어 방송 시작과 동시에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홍콩에 수출될 수 있었다. 국내 방송이 종영되자마자 대만과 홍콩에서 방송되어 시청률 1위를 기록했고, 1년 뒤인 2003년 일본에선 신드롬이 되었다. NHK 위성방송인 BS2에서 ‘겨울 소나타(冬のソナタ)’로 방송되었는데 반응은 말 그대로 폭발적이었다. 2004년 지상파 방송인 NHK에서 방송될 때는 최종회 시청률이 20%를 넘었으니 일본 내 1차 한류다운 성공적 결과였다. 특히 배용준을 비롯하여 한국 배우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시청자들의 요구로 NHK는 재방송할 때 더빙이 아닌 자막방송을 했다. 이는 일본에서 한글 원어로 방송된 첫 사례이기도 했다.

‘겨울연가’에 열광했던 일본 시청층은 중년 여성들이었다. 당시 도쿄대는 ‘겨울연가’ 팬의 평균 연령이 47세이고 93%가 여성이라는 통계를 내놓으면서 가정생활에 충실하면서도 유행에 민감한 여성들이 한류를 상당 기간 지속시키리라 예측했다. 자신을 표현하는데 소극적이었던 중년 여성들은 ‘겨울연가’ 팬이라는 것만으로 강한 연대를 만들어냈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겨울연가’에 매료된 중년 여성들은 열광적 팬덤을 보여주었다. 주인공이었던 배용준은 ‘욘사마’, 최지우는 ‘지우히메’로 불렸는데, 배용준이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공항에는 수천 명의 중년 여성들이 몰려들었고, 방송사들은 국빈이라도 방문한 듯 헬기로 배용준이 이동하는 모습을 중계방송했다. 드라마 촬영지였던 남이섬, 중앙고등학교, 춘천, 외도 등은 ‘겨울연가 성지’가 되어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OST 음반은 종영 전에 이미 30만장 이상이 판매되었고, 주제곡을 부른 가수 류는 일약 스타덤에 오르며 한동안 일본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배용준 목도리, 최지우 목걸이는 당연 최애템이 되었고, 다양한 캐릭터 상품들이 불티나게 판매되었다. 일본 사회 각계에서는 이런 주부들을 향해 걱정의 소리를 쏟아냈지만 어딘가에 있을 자신만의 준상이를 만난 듯 그녀들은 유진이 되어 권위적인 가정에 묻혀 잊고 살았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겨울연가’는 여러 분야에 걸쳐 가치를 창출해냈다. 2004년 말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한류 현상과 문화산업화 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겨울연가’의 경제적 효과는 국내 1조원, 일본 2조원 등 최소한 3조원을 넘는 것으로 추정했다. 한류 열풍은 국내 제조업의 동반성장, 문화콘텐츠 수출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한·일 관계를 생각해 보면 ‘겨울연가’로부터 비롯된 일본 내 한류 열풍은 쉽게 예상할 수 없었다. 양국 국민이 가진 서로에 대한 정서가 다르고 역사적 관계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기에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유행으로 그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일본 내 혐한 인식이나 한·일 간 갈등 관계가 악화하여도 20년 가까이 한류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대중문화가 가진 문화적 가치창조력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내년이면 ‘겨울연가’가 탄생한 지 꼭 20년이 된다. ‘여름향기’, ‘봄의 왈츠’가 한류 열풍을 이어가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일본 내 한류의 시작이었던 ‘겨울연가’가 K팝을 거쳐 K컬쳐, 그리고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 등으로 이어지는 4차 한류의 든든한 초석이었던 것처럼 코로나19 이후 뉴노멀 시대를 주도할 새로운 한류의 등장을 기대해 본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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