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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근절 위해… 텔레그램 본사 찾아 지구 끝이라도 간다”

입력 2020-03-23 04:05:02
최종상 경찰청 사이버수사과장이 지난 19일 서울 미근동 경찰청 사이버안전국 앞에서 전국 경찰의 ‘n번방 텔레그램’을 비롯한 사이버 성범죄 수사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지훈 기자


경찰의 ‘n번방 텔레그램 사건’ 수사는 단순히 아동 성착취물 등 음란물을 제작·유포·소지한 용의자들을 잡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극비리에 세계 각국을 옮겨 다니는 텔레그램 본사 근거지를 추적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과거 음란물 유통 서버가 해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레 수사를 포기하곤 했던 경찰에게 해외 수사 당국과의 ‘국제 공조’가 일상이 돼 가고 있다.

최종상 경찰청 사이버수사과장은 지난 19일 경찰청에서 진행된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사이버 성범죄를 막기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갈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경찰이 현재 주안점을 두고 추진하는 작업은 텔레그램 본사 추적이다.

n번방 사건처럼 텔레그램이 성착취물 유통의 온상으로 부상하면서 텔레그램 본사를 찾아 수사를 진행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했다. 텔레그램 본사를 통해 한국 내 성착취물 유포·소지자들에 대한 신상정보를 확보하고, 이미 유포된 성착취물 삭제·필터링 작업 등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아직 텔레그램 본사 위치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러시아와 독일, 영국, 싱가포르 등을 거쳐 중동의 한 국가로 근거지를 옮겼다는 추정만 있을 뿐이다. 최 과장은 “해당 국가 내 몇 개 주소지를 확보해 지난 2~3월 여러 차례 중동의 한 국가를 대상으로 탐문 조사를 벌였다. 담당자가 현지 경찰의 협조를 받기 위해 몇 주간 해당 국가의 형법과 형사소송법까지 공부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아동 성착취물을 발견하면 신고하거나 차단 조치를 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을 발견해 현지 경찰의 수사 협조를 요청했다.

경찰의 텔레그램 본사 추적은 아직 진행 중이다. 몇 개 주소지에는 다른 법인이 들어서 있거나 비어 있었고, 다른 유력한 근거지 정보를 추가로 수집하고 있다. 최 과장은 “사무실을 두지 않고 일반 주택에서 텔레그램을 운영할 가능성, 서버를 여러 국가에 분리해 놨을 가능성까지 모두 열어두고 추적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얼핏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경찰의 도전에는 배경이 있다. 미국 국토안보부 수사국(HSI)과의 음란물 사이트 수사 공조 성공이 자신감의 근원이 됐다. 2018년 8월 최 과장은 사이버수사과에 부임하자마자 여성시민단체 등으로부터 불법 음란물 사이트 주소 200여개를 제출받았다. 그는 “대부분 사이트들이 해외 서버를 이용하고 있어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고 회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버가 해외에 있으면 경찰의 사이버 성범죄 수사는 중단되기 일쑤였다.

그는 사이버수사과 직원들과 함께 서버 분석 작업부터 다시 시작했다. 최 과장은 “분석해보니 200여개 음란 사이트 중 72%가 미국의 C사 서버를 통하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C사로부터는 미국 수사 당국의 요청이 아니면 응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결국 사이버수사과는 다시 미국 법규에도 위배되는 아동 성착취물 영상을 증거로 확보해 HSI와 공유했고, 그해 11월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음란물 사이트 운영자 IP와 연락처 등을 확보할 수 있었다. 62개 음란물 사이트 정보를 확보한 경찰은 지금까지 21개 사이트를 차단했고, 운영자 등 피의자 17명을 검거해 그중 8명을 구속했다. 나머지 41개 사이트에 대한 수사도 아직 진행하고 있다.

텔레그램 본사를 찾으려는 노력은 성착취물 피해가 더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피해 접수와 동시에 해당 성착취물이 더 이상 유포되지 않도록 삭제·필터링해줄 것을 본사에 요구하기 위해서다. 한때 음란물 유통 경로가 됐던 미국 텀블러(Tumblr) 사건이 대표적이다. 애초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경찰의 필터링 요구를 묵살했던 텀블러 운영사 측은 미국 법 집행기관 등 세계 각국 수사 당국의 압박이 거세지자 2018년 12월 백기를 들고 음란물 필터링·삭제·차단 작업을 시작했다.

경찰은 축적된 국제 공조 방식과 수사 노하우 등을 집약한 매뉴얼 작성 작업을 최근 마무리했다. 특히 사이버 성착취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항목을 작성하는 과정에는 성폭력 관련 시민단체 출신 전문가를 직접 참여시키기도 했다. 최 과장은 “사이버 성범죄가 진화하는 만큼 경찰의 수사 기법도 나날이 발전해가고 있다”며 “텔레그램은 안전하다며 아무런 죄의식 없이 성착취물을 유포·소지해온 모든 가담자들은 곧 수갑을 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onlinenew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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