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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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사람들

입력 2020-03-04 04:05:01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중략)//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중략)/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일부)

좋은 글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는 이유가 있다. 김수영의 시와 산문은 독자에게 불편함을 안김으로써 성찰과 반성의 계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물론 문제적인 작품이 다 좋은 글이라는 공식은 없다. 하지만 문제적인 글은 독서행위가 끝난 뒤의 지적 포만감 즉, 적어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자족감을 준다는 점에서 성공한 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의 시와 산문을 읽다보면 몸 안쪽에 내밀하게 숨겨온 거짓과 위선이 백일하에 바깥으로 드러나는 당혹감을 스스로 맛보게 된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나이와 상관없이 내면 깊숙이 성장을 멈춘 어린아이가 들어 있다가 돌발적인 상황 속에서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살면서 작고 사소한 일에 집착하고 분노하는 것은 이 어린아이를 스스로 다스리지 못한 것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나이가 들었다 해서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든 이라 할지라도 시도 때도 없이 내면의 아이가 튀어나온다면 그는 어른으로 살아간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김수영은 시를 통해 자신이 어른으로 살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시인 김수영의 문제만일까. 대부분의 사람들도 김수영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가 보편적 공감과 울림을 주는 것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문제적 ‘김수영’을 스스로 인지한 때문이 아닐까.

‘자유’와 ‘사랑’과 ‘현대성’의 시인 김수영은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관념으로서의 문학이 아닌 행위로서의 문학을 말하는 것이다.

좋은 시는 시간의 풍화작용을 이겨내는 힘이 있다. 이 시가 바로 그렇다. 여전히 강한 울림을 주고 있는 이 시편은 ‘불편한 진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뼈아픈 자성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김수영의 시편들은 우리를 즐거운 고통에 빠지게 한다. 소시민적 자의식에 괴로워하는 시적 주체들은 시인 자신의 진실한 모습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공감하는 독자들의 실제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편들을 읽는 일은,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자가 갑자기 환한 햇빛 속으로 불려나왔을 때처럼 꽁꽁 쟁여 비밀하게 숨겨온 안쪽의 비루한 욕망이며 비굴한 속성들이 불쑥, 몸 바깥으로 출현할 때의 당혹을 맛보는 일과도 같다(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을 보면서도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큰 싸움 앞에서는 두려워 망설이면서 아주 사소한 싸움에 목숨을 거는 시적 주체의 비겁한 모습은 반복 순환으로서의 기계적 일상을 자동화된 의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초상이 아닌가.

김수영은 자신 안에 기식하는 비겁과 안일과 굴욕과 부도덕을 가감 없이 직방으로 드러내는 시인이다. 이 정직성이 그의 성찰과 반성에 강한 믿음을 심어준다. 무반성보다 더 나쁜 것이 반성의 관성화이다. 부정과 비리에 연루된 지도층 인사들의 입에 발린 반성을 보라. 구린내가 진동하지 않는가. 시인이 쏘아대는 말의 화살촉이 거듭 마음의 과녁에 와서 꽂힌다.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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