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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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 만화경

입력 2020-02-03 04:10:01


주말마다 공원 놀이터에서 혼자 노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를 본 것은 반년이 넘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네를 타거나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 있는데 그 아이는 늘 혼자 놀았다. 아이 엄마가 창문에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집으로 들어오라고 해도 아이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눕거나 앉은 채로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동네 주민이 그 아이에 대해 귀띔해주었는데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이후로 아이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아이를 더욱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다. 아이는 늘 허름한 옷차림이었고 낮시간에 공원 벤치에 앉아 무언가를 눈에 붙이고 있었다. 만화경이었다.

사내아이들이 다가와 말을 건네도 그 아이는 만화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 아이가 그 아이의 뒤통수를 툭 치고 도망갔다. 아이는 아무런 반격 없이 벤치에 누운 채로 만화경을 들여다봤다. 나는 아이가 손에 쥔 만화경을 빼앗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자연스레 처음으로 선물 받은 만화경이 떠올랐다. 예쁜 천을 둥근 통에 입힌 만화경이었는데 겉모습에 반해 온종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갖고 놀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만화경을 손에 쥐어준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나는 며칠간 안을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자랑만 하고 다녔다. 그리고 가족이 모두 잠든 뒤 잠이 오지 않아 눈을 말똥말똥 굴리던 어느 깊은 밤, 침대에 엎드려 만화경 입구에 눈을 붙였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만난 만화경은 야생의 풍경에 가까웠다. 초록색 알갱이들이 메뚜기처럼 툭 튀어 오르기도 했고 한두 개의 포도 알이 갑자기 알이 무성히 달린 포도송이가 되기도 했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쌍둥이 데칼코마니가 쏟아져 나왔다.

시각적으로 화려한 볼거리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만화경은 골동품으로 취급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의 아이를 보니 만화경의 매력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외로워 보이지만 외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의 생각과 달리 아이는 화려하고 다채로운 세계에서 잠시 길을 잃었을 뿐일지도 모르니까.

김의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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