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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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 귀신 잡는 약

입력 2020-01-03 04:10:01


“어떤 일로 오셨나요”라는 물음에 소아정신과에서 듣는 답은 일정한 편이다. 발달이 늦어서, 친구나 학교 문제가 있어서, 우울해서, 틱 때문에 등. 그런데 그날은 내 빈약한 상상을 벗어나는 답을 듣게 되었다. “애가 악귀에 씌어서요.” 당황한 내가 눈만 껌뻑이는 동안 쏟아진 아이 아버지의 말을 정리해보면, 요즘 아이가 새벽마다 깨어 부모도 못 알아보고 한참 악을 쓰며 울부짖다가 갑자기 까무룩 기절하듯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아침이 되면 간밤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니, 주변에서는 애가 귀신이라도 씐 것 아니냐는 말들이 나왔다. 그런 엉뚱한 얘기에 아버지는 처음엔 콧방귀를 뀌었지만, 걱정이 된 집안 어른들이 찾아간 점집에서조차 아이에게 악령이 들어 굿을 하는 수밖에 없다 하니 더 이상 그 말을 무시하기 어렵게 되었다. 온갖 인생의 풍파를 넘겨온 그이건만, 어렵게 가진 자식의 일에는 그만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직장 동료가 굿을 하기 전에 병원에라도 한번 가볼 것을 권해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찾아오게 되었다고 했다.

아이의 증상은 그 시기 아이들에게 뇌의 발달 중 나타날 수 있는 야경증(night terror)이라는 것으로, 잠시 나타났다 없어지는 경우가 많아 보통 악몽 때문이려니 하고 넘어가게 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는 증상이 계속 반복되어 나타나는 바람에 그런 오해까지 받은 것이다. 착잡한 표정의 아버지에게 나는 야경증에 대해 설명해주고 약을 처방했다. 덜렁 약 한 알만 먹여보라는 처방에 아이의 아버지는 잠시 당황하다가, 밑져야 본전이겠다며 약을 받아갔다. 다음 진료일에는 직장에 간 남편 대신 왔다며 아이 어머니가 아이와 함께 왔다. 약을 먹자마자 아이의 증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기쁘게 전하는 엄마의 말에 아이도 생글생글 웃었다. “선생님, 그런데 약 한 알로 어떻게 귀신을 쫓아냈죠?” 지난 진료 때 설명을 아이 아버지가 미처 못 전한 모양이었다. 순간 아이 어머니의 생각처럼 모른다는 이유로 벌어지는 혐오와 두려움을 없애 줄 “귀신 잡는 약”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졌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쁘게 처방할 텐데 말이다.

배승민 의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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