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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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김태용]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입력 2018-06-18 04:05:01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이 끝나고 전 세계 사람들은 한 편의 영화를 동시에 보았다. 국제미디어센터 스크린에 투사된 영상들과 내레이션에 감각이 집중되었다. 5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한반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압축하고 역사적 질문을 던지는 영상이었다. 불연속적인 이미지를 속도감 있게 연결·충돌시키고 있었다. 백악관에서 만든 영상으로 사전에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여주고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말이 기자회견에서 나오기도 했다. 이미지와 내레이션이 머리와 가슴에 스며드는 사이,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와 이후에 다시 찾아보았다. 역사적 선택을 예고하는 영상의 중간 부분에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와 필름이 타들어가는 장면이 보였다.

그 장면을 보면서 참혹하고 빛나는 역사의 순간들이 우리의 머릿속에 영상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영상을 통한 기록, 영상을 통한 교육, 영상을 통한 비전 속에서 우리의 감각기관과 사고체계도 달라지거나 발달하고 있다. 기억의 마디마다 필름 조각이 꽂혀 있다. 러닝타임이 다른 영화가 기억 속에서 재편집되어 상영되곤 한다. 우리의 지난 역사는 구겨지고, 찢어지고, 불에 탄 필름의 잔해들로 가득한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동시상영관에서 영화를 볼 때 필름이 끊기고, 구멍 나고, 다른 필름이 이어져 기괴한 영화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른들의 야유와 함께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판타지의 세계로 남아 있지만 더 이상 필름 영화를 쉽게 볼 수 없다는 문화적·매체적 아쉬움이 지속되고 있다. 사실과 진실을 확인할 수 없는 역사의 그을린 여백 속을 건너가고 있는 것만 같다.

북·미 회담이 끝나고 북한에서는 김 위원장의 회담 영상을 만들어 공개했다. 체제 홍보용인 매끄러운 디지털 영상 이면에 감춰진 필름들이 궁금했다. 찢기고, 구멍 나고, 불에 탄 필름들을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복원해야 하는 과정의 영화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 그 영화는 한 개인의 라이프 러닝타임을 초과할지도 모르겠다.

김태용(소설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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