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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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김태용] 세계의 일기

입력 2018-06-11 05:10:02


내가 쓴 최초의 문장은 무엇일까?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 문장을 찾기 위한 시간의 여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시간은 무수한 언어들로 가득 찬 세계다. 매 순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나라는 필터를 통과해 언어로 재조립된다. 중학교 때부터 일기를 쓰고 있는데 기록 방식은 다양하다. 때로는 감정의 토로로, 객관적 서술로, 장소들과 음식들의 나열로, 추상적인 그림으로 바뀌거나 뒤섞여 있다. 날짜만 쓰여 있는 텅 빈 지면도 자주 발견하곤 한다.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고, 누구를 만났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생략돼 있지만 그 어느 날보다 중요한 날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기록할 수도 없을 만큼 바쁘고 중요한 날.

개인의 일기가 온전히 한 사람만을 위한 기록일 수 있을까. 그 글들은 잠재적으로 독자를 기다리고 있는 비밀스러운 텍스트가 아닐까. 현재 우리가 쓰는 블로그와 SNS, 심지어 신문 기사에 대한 댓글들 역시 일기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 많은 언어들을 소비하면서 개인의 생각과 감상을 드러내고 있다. 일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는 블로거들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한 사람의 공개 일기에 댓글이나 ‘좋아요’라는 표시로 우리의 감상 일기를 짧게 덧붙인다. 우리의 글에 자동적으로 시간이 입력된다. 우리들은 매일 무언가를 쓰고 있다. 시간이 기록된 우리의 글은 세계의 일기라고 할 수 있다.

요즘처럼 세계의 일기를 함께 읽는 날도 드물다. 6·12 북·미 정상회담, 6·13 지방선거, 6·14 러시아월드컵을 두고 주변에서 많은 말들이 들려온다. 대통령의 사전투표를 보고 북·미 회담 이벤트를 예측하고, 선거 결과와 죽음의 조인 축구대표팀 등에 대한 이야기에 등을 돌리고 귀를 막기는 쉽지가 않다. 이미 우리의 머릿속에 가능한 빅픽처와 데이터들이 넘쳐날 것이다. 며칠 동안 그리고 이후에 우리는 세계의 일기를 어떻게 쓰고 있을까. 시간의 흐름과 함께 누군가는 최초의 문장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 그 문장이 더 밝은 곳에서 빛나기를 바란다.

김태용(소설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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